스웨덴 스톡홀름에는 침몰한 배 한 척을 위해 지은 박물관이 있어요. 1961년 인양된 뒤 2025년 초까지 4,5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보러 온 군함 바사호예요. 이 배는 전투에서 진 적이 없어요. 전투에 나가 보지도 못했어요. 1628년 8월 10일 첫 항해에 나선 지 약 1,300m 만에 바람을 맞고 옆으로 넘어가 그대로 가라앉았거든요.
왕이 서둘러 주문한 '두 층 대포' 군함
바사호를 주문한 사람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예요. 당시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1626~1629년)을 벌이고 있었고, 해군은 잇단 사고로 배를 많이 잃은 상태였어요. 1625년에는 리가만에서 폭풍을 만나 배 열 척이 좌초했고, 1627년 올리바 해전에서는 큰 배 두 척을 잃었어요.
대포에 관심이 많았던 왕은 큰 대포를 두 층 갑판에 가득 싣는 새로운 군함을 원했어요. 1625년 1월 16일 네덜란드 출신 조선 기술자 헨리크 휘베르트손과 사업가 아렌트 더 흐로테가 배 네 척을 짓는 계약을 맺었고, 1626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바사호의 용골이 놓였어요. 그런데 휘베르트손은 1625년 말에 병이 들었고, 1627년 봄에 세상을 떠났어요. 공사는 다른 네덜란드 기술자 헨리크 야콥손이 이어받았어요.
왕은 1626년 8월 5일 24파운드 대포 72문을 주문했어요. 한 층에는 다 들어가지 않는 숫자였어요. 최종 무장은 24파운드 대포 56문을 두 층에 나눠 싣는 것으로 정해졌고, 배가 출항할 때까지 계획한 72문 가운데 8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한쪽 뱃전에서 한 번에 쏠 수 있는 포탄 무게가 588파운드, 약 267kg으로 당시 발트해에서 가장 강한 화력이었어요.

서른 명이 세 번 뛰고 멈춘 안정성 시험
1628년 여름, 건조를 감독하던 선장 쇠프링 한손은 막 스톡홀름에 도착한 해군 부제독 클라스 플레밍 앞에서 배의 안정성을 보여 주는 시험을 했어요. 선원 30명이 갑판 위를 이쪽저쪽으로 뛰어다니며 배를 흔드는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세 번 왕복하자 배가 너무 크게 기울었고, 플레밍은 배가 뒤집힐까 봐 시험을 멈추게 했어요.
배의 항해장 예란 마트손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플레밍은 왕이 국내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만 했어요. 왕은 폴란드 전선에 있었고, 배를 빨리 바다에 내보내라는 편지를 계속 보내고 있었어요. 문제를 알았지만 누구도 출항을 미루자고 나서지 못했어요.
두 번째 돌풍, 열린 포문으로 쏟아진 물
1628년 8월 10일, 날씨는 잔잔했고 남서쪽에서 약한 바람만 불었어요. 바사호는 닻줄로 끌려 항구 남쪽으로 옮겨진 뒤 돛 네 장을 펴고 동쪽으로 나아갔어요. 출항 축포를 쏘려고 포문은 열려 있었고 대포도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의 스톡홀름 시민이 배가 떠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 가운데에는 외국 대사들도 섞여 있었어요.
남쪽 절벽(지금의 쇠데르말름) 아래를 지날 때 돌풍이 돛을 채우자 배가 갑자기 왼쪽으로 기울었어요. 돛줄을 풀자 배는 천천히 다시 일어섰어요. 하지만 절벽이 끊긴 테겔비켄에서 더 센 돌풍이 다시 배를 왼쪽으로 눕혔고, 이번에는 열려 있던 아래층 포문이 물에 잠겼어요. 바닷물이 아래 포갑판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배는 버티지 못하고 깊이 32m 바닥까지 가라앉았어요. 해안에서 겨우 120m 떨어진 곳이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떠다니는 잔해나 아직 물 위로 나온 돛대 꼭대기에 매달렸어요. 근처의 많은 배가 달려와 구조에 나섰지만 기록에 따르면 30명이 배와 함께 목숨을 잃었어요.
| 항목 | 기록 |
|---|---|
| 침몰 날짜 | 1628년 8월 10일(첫 항해) |
| 항해 거리 | 약 1,300m |
| 침몰 지점 | 수심 32m, 해안에서 120m |
| 희생자 | 약 30명(기록) |
| 주요 무장 | 24파운드 대포 56문 계획, 출항 때 일부 미도착 |
| 한쪽 일제 사격 무게 | 588파운드(약 267kg) |
| 바닷속에 있던 기간 | 333년(1961년 인양) |
"하느님만 아십니다"로 끝난 조사
추밀원은 사고 다음 날 왕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폴란드에 있던 왕에게 닿기까지 2주가 넘게 걸렸어요. 왕은 '경솔함과 태만'이 원인이었을 것이라며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화를 냈어요. 살아남은 한손 선장은 곧바로 붙잡혀 심문을 받았고, 대포는 제대로 묶여 있었고 선원들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맹세했어요.
1628년 9월 5일 왕궁에서 정식 조사가 열렸어요. 선원 쪽과 조선업자 쪽은 서로를 탓했고, 앞서 했던 안정성 시험 이야기도 이 자리에서 드러났어요. 검사는 조선 기술자 야콥손에게 왜 배를 그렇게 좁고 바닥이 얕게 지었느냐고 따졌어요. 야콥손은 세상을 떠난 휘베르트손이 왕이 승인한 설계대로 지었을 뿐이라고 답했어요. 사실 야콥손은 공사를 넘겨받은 뒤 배 폭을 1피트 5인치, 약 43cm 넓혔지만 그 이상은 공사가 너무 진행돼 손댈 수 없었다고 해요.
배가 왜 가라앉았느냐는 질문에 아렌트 더 흐로테는 '하느님만 아십니다'라고 답했어요. 치수와 무장은 모두 왕이 승인한 것이었고, 배는 그 지시대로 지어졌어요. 결국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고, 책임은 사실상 이미 세상을 떠난 휘베르트손에게 돌아갔어요.
진짜 원인: 배가 '배'가 모자랐어요
바사호가 넘어간 이유는 초기 복원성, 즉 바람이나 파도에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힘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에요. 물 위로 나온 선체가 물에 잠긴 부분에 비해 지나치게 높고 무겁게 지어져 무게중심이 높았어요. 흔히 대포가 너무 무거웠다고 생각하지만 대포 무게는 60톤을 조금 넘는 정도로, 짐을 실은 배 전체 배수량의 약 5%였어요. 대포만으로 배가 뒤집힐 정도는 아니었어요.
갑판 사이 높이도 필요 이상으로 높았어요. 당시 선원의 평균 키는 약 1.67m였는데, 천장이 높아지면서 갑판과 대포의 무게가 그만큼 위로 올라갔어요. 갑판을 받치는 들보도 필요보다 굵고 촘촘했어요. 사고 뒤 조사에 불려 나온 한 선장은 이 배가 무거운 윗부분을 감당할 만큼 '배'가 넉넉하지 않았다고 정리했어요.
건조 과정에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단위 문제도 확인됐어요. 공사에는 스웨덴 피트(29.69cm)와 암스테르담 피트(28.31cm)가 함께 쓰였어요. 배를 지은 일꾼들이 쓰던 자 네 개가 발견됐는데, 두 개는 12인치로 나뉜 스웨덴 피트, 두 개는 11인치로 나뉜 암스테르담 피트였어요. 배의 양쪽에서 서로 다른 길이 단위를 쓴 탓에 배는 왼쪽이 더 무거웠어요. 배가 처음에도, 두 번째에도 왼쪽으로 넘어갔다는 기록과 함께 읽으면 더 아찔한 대목이에요.
포문도 문제였어요. 포문이 여러 층인 배는 보통 가장 아래층 포문을 닫고 다녔어요. 돛에 바람을 받으면 배가 기울어 아래층 포문 문턱이 물에 잠기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에요. 한손 선장은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뒤에야 아래층 포문을 닫으라고 명령했어요. 출항 전에 닫았다면 바사호는 적어도 그날 가라앉지는 않았을지도 몰라요.

잠수종으로 건져 올린 대포 50여 문
사고 뒤 사흘도 안 돼 배를 끌어올리는 계약이 맺어졌지만 실패했어요. 영국인 기술자 이언 벌머는 배를 똑바로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배가 진흙에 더 단단히 박히게 만들었어요. 침몰 30여 년 뒤인 1663~1665년에는 알브레크트 폰 트레일레벤과 안드레아스 페켈이 값비싼 청동 대포를 노렸어요. 스웨덴과 핀란드 잠수부들은 간단한 잠수종을 이용해 대포를 50문 넘게 건져 올렸어요.

그 뒤로 배는 잊힌 듯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스웨덴 역사책에 이름이 남았고, 19세기 스톡홀름 항구 해도에는 침몰 위치가 표시돼 있었어요. 하지만 바사호가 가라앉은 곳은 배들이 많이 오가는 항로였어요. 배들이 그 위에 닻을 내렸고, 19세기쯤 큰 닻 하나가 선미 위쪽을 거의 부숴 버린 것으로 보여요. 항구 공사에서 나온 돌 부스러기도 배 위에 쏟아졌어요.
333년 만에 다시 물 위로
1950년대 초, 아마추어 고고학자 안데르스 프란센은 발트해의 차갑고 덜 짠 바닷물에는 나무를 갉아 먹는 배좀벌레조개가 살지 않으니 옛 난파선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오랜 조사 끝에 1956년 그는 직접 만든 시료 채취 장치로 베크홀멘섬 근처에서 커다란 나무 덩어리를 찾아냈어요.
인양 방법으로는 배 안을 탁구공으로 채우자는 안, 얼음덩어리로 얼려 띄우자는 안까지 나왔어요. 실제로 고른 방법은 1628년에 시도했던 것과 원리가 같았어요. 잠수부들은 2년 동안 배 밑 진흙에 강철 케이블을 걸 터널 여섯 개를 팠어요. 수백 톤의 진흙 찬 배 아래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일하는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1,300번이 넘는 잠수 동안 큰 사고는 한 번도 없었어요.
1959년 8~9월 18번에 걸쳐 끌어올려 배를 수심 32m에서 16m로 옮겼고, 1년 반 동안 배를 가볍게 하고 구멍을 막았어요. 최종 인양은 1961년 4월 8일 시작됐고, 4월 24일 아침 바사호의 나무가 333년 만에 수면 위로 드러났어요. 초대 손님 400명과 해안의 수천 명,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그 장면을 지켜봤어요. 마지막 인양 전날 밤에는 헬싱키 공과대학 학생들이 장난으로 핀란드 육상 선수 파보 누르미의 조각상을 배 위에 올려놓기도 했어요.

배 안팎에서는 수천 점의 유물과 최소 15명의 유골이 나왔어요. 옷, 무기, 대포, 연장, 동전, 식기, 음식과 술, 그리고 돛 열 장 가운데 여섯 장이 함께 발견됐어요. 쓰지 않은 돛 여섯 장은 돛 창고에 접힌 채 쌓여 있었던 덕분에 남을 수 있었어요. 1963~1967년 침몰 지점 발굴에서는 진흙에 떨어져 있던 조각상 대부분과 닻, 길이 11.7m의 작은 보트도 건졌어요.
지금도 끝나지 않은 보존 작업
물에서 나온 나무를 그냥 말리면 금세 갈라지고 뒤틀려요. 바사호는 참나무만 600㎥가 넘는 거대한 덩어리였어요. 보존팀은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을 17년 동안 배에 뿌렸고, 이어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말렸어요. 이 방법은 이후 물에 젖은 큰 목재 유물을 보존하는 표준이 됐어요.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어요. 오염된 항구 물에서 나무에 스며든 황 화합물이 공기 속 산소와 만나 산을 만들기 시작했거든요. 2002년 기준으로 선체 속 황산은 2톤이 넘는 것으로 추정됐고, 앞으로도 해마다 약 100kg씩 최대 5,000kg이 더 생길 수 있다고 해요. 박물관 전시실은 18~20℃, 습도 53%로 유지되고, 녹슬던 볼트는 특수 스테인리스강 볼트로 바꿨어요. 박물관은 2023년 말 1억 5,000만 크로나를 들여 배를 받칠 새 받침대와 내부 지지 구조를 만들겠다고 발표했어요. 박물관 관계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배가 다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바사호
1628년 8월 10일 침몰부터 1961년 4월 24일 인양까지는 332년 8개월 남짓이에요. 연도로 빼면 333년이라 흔히 333년이라고 불러요. 588파운드는 1파운드를 0.4536kg으로 계산하면 약 267kg이에요. 스웨덴 피트와 암스테르담 피트는 한 자에 1.38cm 차이가 나요. 10피트만 재도 13.8cm가 어긋나는 셈이에요.
재미있는 건 인치예요. 스웨덴 피트는 12인치, 암스테르담 피트는 11인치로 나뉘어서 1인치 길이가 각각 약 2.47cm와 약 2.57cm였어요. 피트는 스웨덴 쪽이 더 긴데 인치는 암스테르담 쪽이 더 길었던 거예요. 같은 '인치'라는 이름으로 이런 차이가 나면 현장에서 헷갈리기 쉬웠을 거예요. 대포 60여 톤이 배수량의 약 5%라는 기록을 거꾸로 계산하면 짐을 실은 배 전체 무게는 대략 1,200톤 안팎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어요. 앞으로 생길 수 있는 산 5,000kg을 해마다 100kg씩 나누면 약 50년 동안 계속 생긴다는 뜻이에요.
| 단위 | 스웨덴 피트 | 암스테르담 피트 |
|---|---|---|
| 1피트 길이 | 29.69cm | 28.31cm |
| 1피트를 나눈 인치 수 | 12인치 | 11인치 |
| 1인치 길이(계산) | 약 2.47cm | 약 2.57cm |
| 10피트 길이(계산) | 296.9cm | 283.1cm |
실패한 배가 남긴 것
바사호 다음에도 두 층 포갑판 군함은 계속 지어졌어요. 자매선으로 꼽히는 애플레트호는 1629년에 완성됐는데, 바사호와 거의 같지만 폭이 약 1m 더 넓었어요. 이 배의 잔해는 2021년 12월에 발견됐어요. 침몰 뒤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웨덴은 네덜란드 조선 기술자 대신 영국 기술자를 쓰기 시작했어요. 영국 조선소는 새 배의 설계도를 종이에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주문자와 의논했는데, 바사호를 지은 네덜란드식 방법은 종이 설계도를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오늘날 바사호는 17세기 배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배로, 당시의 해전과 조선 기술, 배 위의 일상을 알려 주는 귀한 자료가 됐어요. 출항 몇 분 만에 가라앉은 실패작이 거꾸로 그 시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배가 된 셈이에요.
배나 보트에 탈 때는 정원과 적재 한도를 지키고, 짐을 높은 곳이나 한쪽에 몰아 싣지 마세요. 배가 크게 기울거나 물이 들어오면 즉시 구명조끼를 입고 승무원의 안내를 따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