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없던 시절, 하늘로 북극점에 가려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1897년 7월 스웨덴의 기술자 S. A. 안드레와 두 동료는 수소를 채운 기구를 타고 노르웨이 북쪽 스발바르 제도를 떠났어요. 그 뒤로 소식이 끊겼어요. 33년이 지난 1930년, 북극해의 외딴섬에서 세 사람의 유해와 일기, 그리고 필름이 발견됐어요. 물에 젖은 필름에서 되살린 사진에는 그들이 얼음 위에서 보낸 마지막 몇 달이 담겨 있었어요.
세 명의 탐험대와 기구 '독수리'
탐험대는 세 사람이었어요. 대장 살로몬 아우구스트 안드레, 그리고 크누트 프렝켈과 닐스 스트린드베리예요. 스트린드베리는 사진을 맡았어요. 그들이 탈 기구의 이름은 스웨덴어로 '독수리'라는 뜻의 '외르넨'이었어요. 니스를 바른 비단을 세 겹으로 겹쳐 만든 수소 기구였고 지름이 20.5m였어요. 파리의 앙리 라샹브르가 만들었어요.
계획은 스발바르에서 바람을 타고 북극점 근처나 위를 지나 러시아나 캐나다까지 날아가는 것이었어요. 기구 아래로 긴 밧줄을 늘어뜨려 땅에 끌리게 하는 방식으로 높이와 방향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이 '끌림 밧줄'이 계획의 핵심이었어요.

특허청 기술자의 꿈
안드레는 스톡홀름 특허청에서 일하던 기술자이자 열성적인 기구 비행가였어요. 1882~1883년에는 닐스 에크홀름이 이끈 스발바르 지구 물리 관측 탐사에 참여했어요. 1893년에는 '스베아'라는 기구를 사서 스톡홀름과 예테보리에서 아홉 번 비행했고, 모두 합쳐 약 1,500km를 날았어요. 바람에 실려 발트해를 건너 핀란드까지 간 적도 있어요.
탐험에는 큰돈이 들어갔어요.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13만 800크로나의 예산을 승인했고, 그 가운데 3만 6,000크로나가 기구 값이었어요. 국왕 오스카르 2세가 개인적으로 3만 크로나를 냈고, 알프레드 노벨도 큰 후원자였어요. 사실 탐험대는 1896년에 한 번 출발하려 했어요. 그런데 기구 격납고 쪽으로 북풍이 계속 불어 끝내 이륙하지 못하고 기구의 가스를 빼고 돌아갔어요.
출발 전에 이미 드러난 경고
출발 전부터 문제가 보였어요. 탐험대에 참여했던 과학자 닐스 에크홀름은 기구에서 새어 나가는 수소 때문에 하루에 약 68kg의 부력이 사라진다고 계산했어요. 이대로라면 기구가 떠 있을 수 있는 기간은 계획한 30일이 아니라 최대 17일이라는 결론이었어요. 그래도 탐험은 강행됐어요.
에크홀름은 더 잘 밀봉된 기구를 사지 않으면 1897년 탐험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나중에 그는 안드레가 몰래 수소를 더 채워 넣어 자신의 측정값이 이상하게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에크홀름의 자리는 27살의 기술자 크누트 프렝켈이 대신했어요.
기구에 실은 것들
기구에는 약 767kg의 식량이 실렸어요. 물 200리터, 후원받은 샴페인과 포트와인과 맥주, 말린 고기 반죽인 페미컨, 소시지, 치즈, 연유, 레몬즙 조금이 들어 있었어요. 장비로는 총, 설피, 스키, 썰매, 텐트, 그리고 나뭇가지를 휘어 뼈대를 만들고 기구 비단을 씌운 작은 보트가 있었어요. 스트린드베리의 카메라는 약 7kg이었어요.
1897년 7월 11일, 출발 몇 분 만의 사고
1897년 7월 11일, 남서풍이 꾸준히 부는 날 외르넨은 스발바르 제도의 단스쾨야섬을 떠났어요. 그런데 이륙 직후 큰일이 벌어졌어요. 처음 몇 분 사이에 끌림 밧줄 약 530kg과 모래주머니 약 210kg, 합쳐서 약 740kg이 떨어져 나갔어요. 높이를 조절할 밧줄도, 균형을 잡을 모래도 대부분 잃은 거예요. 기구를 조종할 방법이 거의 남지 않았어요.
| 항목 | 기록 |
|---|---|
| 출발 | 1897년 7월 11일, 스발바르 단스쾨야섬 |
| 잃은 밧줄과 모래 | 약 530kg + 약 210kg = 약 740kg |
| 자유 비행 | 10시간 29분 |
| 이후 얼음에 부딪히며 떠간 시간 | 약 41시간 |
| 전체 비행 | 2일 3시간 30분(약 51.5시간) |
| 착륙 | 1897년 7월 14일, 얼음 위, 부상자 없음 |
제대로 날아간 시간은 10시간 29분이었어요. 그 뒤 약 41시간 동안 기구는 얼음에 자주 부딪히며 덜컹거리며 떠갔어요. 출발한 지 2일 3시간 30분 만인 7월 14일, 세 사람은 기구를 버리고 얼음 위에 내려섰어요. 착륙은 부드러웠고 다친 사람은 없었어요. 북극점까지는 한참 남은 곳이었어요.
하늘에서 보낸 마지막 소식들
기구는 바깥으로 소식을 보낼 수단을 두 가지 챙겼어요. 하나는 코르크로 감싼 강철 통에 쪽지를 넣어 떨어뜨리는 부표였어요. 바다를 떠돌다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바란 거예요. 실제로 발견된 부표 쪽지는 두 개뿐이에요. 출발 몇 시간 뒤에 띄운 첫 쪽지는 고도를 약 250m로, 한 시간 뒤의 두 번째 쪽지는 600m로 적고 있어요.
다른 하나는 신문사 아프톤블라데트가 내준 전서구였어요. 안드레는 적어도 네 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발견된 것은 한 마리뿐이었어요. 그마저 노르웨이 증기선의 선원이 쏘아 떨어뜨린 것이었어요. 비둘기가 지닌 쪽지는 7월 13일자로, 위치를 북위 82도, 동경 15도 5분으로 적고 '배 위는 모두 순조롭다'고 전했어요.
석 달 동안 얼음 위를 걸었어요
세 사람은 썰매에 짐을 싣고 걷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프란츠요제프제도의 케이프 플로라에 마련된 보급 창고를 목표로 했다가, 나중에는 스발바르 북쪽의 시외위아 제도로 방향을 바꿨어요. 그런데 그들이 걷는 바다 얼음 자체가 바람과 해류에 떠밀려 움직였어요. 아무리 걸어도 얼음이 반대쪽으로 흘러가 되돌아가기 일쑤였어요.

식량은 사냥으로 보탰어요. 되살아난 사진 가운데에는 사냥한 북극곰 옆에 선 두 대원의 모습도 있어요. 9월 12일부터 그들은 떠다니는 얼음덩이 위에 겨울을 날 곳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10월 2일 그 얼음이 그들의 오두막 아래에서 갈라졌고, 세 사람은 가까운 섬 크비퇴위아로 옮겨 갔어요. '하얀 섬'이라는 뜻의 이름이에요. 스트린드베리의 일기에 따르면 섬에 오른 날은 10월 5일이에요.

안드레의 마지막 일기는 10월 8일자예요. 세 사람은 10월 7~8일 직후 숨진 것으로 추정돼요. 스트린드베리가 가장 먼저 숨졌고, 남은 두 사람이 그를 바위틈에 묻었어요.
1930년, 33년 만의 발견
1930년 8월 5일, 노르웨이의 바다표범 사냥배 브라트바그호의 선원들이 크비퇴위아에서 탐험대의 흔적을 찾았어요. 9월 5일에는 다른 탐사선 이스비에른호가 프렝켈의 유해와 더 많은 유품을 찾아냈어요. 세 사람의 일기가 모두 나왔어요. 그리고 물에 젖은 통에 든 필름이 있었어요.
스트린드베리는 얼음 위에서 사진을 약 200장 찍었어요. 크비퇴위아에서 나온 필름에는 노출된 프레임이 240장 있었고, 스웨덴 왕립 공과대학의 욘 헤르츠베리가 이 가운데 93장을 되살렸어요. 33년 동안 얼음 속에 있던 필름에서 나온 사진이라 흐릿하고 얼룩져 있지만, 쓰러진 기구와 썰매와 북극곰 사냥 장면이 분명하게 남아 있어요. 탐험대가 직접 남긴 시각 기록이에요.
유해는 1930년 10월 5일 스톡홀름에 도착했어요. 크비퇴위아에 오른 지 꼭 33년째 되는 날이었어요. 장례 행렬에 대해 역사가 스베르케르 쇠를린은 스웨덴에서 가장 엄숙하고 장엄한 국민 애도의 표현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했어요.

유해와 함께 나온 물건들도 많은 것을 말해 줬어요. 브라트바그호 선원들은 옷에 새겨진 머리글자로 안드레와 스트린드베리의 유해를 알아봤고, '안드레 북극 탐험대, 1896'이라고 새겨진 배 갈고리도 찾았어요. 기자들이 빌린 이스비에른호는 프렝켈의 유해와 함께 스트린드베리의 필름, 항해 일지, 지도가 든 양철 상자를 찾았어요. 스트린드베리의 속기 일기에는 약혼녀 안나 샤를리에에게 보내는 글이 여러 군데 적혀 있었어요.
세 사람은 왜 숨졌을까요
섬에는 식량과 장비가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사인을 두고 여러 설이 나왔고 아직 하나로 정해지지 않았어요.
- 덜 익힌 북극곰 고기로 걸린 선모충증(1952년 에른스트 트뤼데의 주장)
- 북극곰의 습격, 특히 스트린드베리의 경우(2010년 베아 우스마의 주장)
- 비타민 A 과다, 일산화탄소 중독, 납 중독, 괴혈병, 보툴리누스 중독
- 추위와 저체온증, 극한 상황에서의 자살
북극곰 간에는 비타민 A가 매우 많아서 먹으면 중독될 수 있어요. 비좁은 텐트에서 연료를 태우면 일산화탄소가 쌓일 수 있어요. 어떤 설명이든 북극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동시에 견뎌야 하는 일인지 보여 줘요.
1930년 그들은 영웅으로 애도받았지만 평가는 시간이 지나며 달라졌어요. 1967년 페르 올로프 순드만의 소설 『독수리의 비행』은 안드레를 두려움에 쫓기고 언론의 기대에 휘둘린 인물로 그렸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얀 트로엘 감독의 1982년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어요.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안드레에게 비판적이에요. 기구로 북극점을 넘겠다는 계획 자체가 비현실적이었고, 그가 믿었던 끌림 밧줄 조종법도 현대의 기구 비행가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방식이라고 봐요. 썰매도 문제였어요. 단단한 썰매는 깨진 얼음 위에서 쓰기 어려웠고, 한 대에 200kg이 넘던 짐을 일주일 만에 130kg으로 줄여야 했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안드레 탐험대
1897년 7월 11일 출발부터 크비퇴위아에 오른 10월 5일까지는 86일이에요. 그중 하늘에 있던 시간은 약 51.5시간, 이틀 남짓이었어요. 나머지 83일가량을 얼음 위에서 걸었어요. 이륙 직후 잃은 740kg은 성인 남성 열 명의 몸무게와 비슷해요. 실종에서 발견까지는 33년이 걸렸고, 필름 240장 가운데 살아남은 사진 93장은 약 39%예요. 수소가 하루 68kg씩 새어 나갔다면 열흘이면 680kg의 부력이 사라져요. 출발 직후 잃은 밧줄과 모래의 무게와 맞먹는 양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