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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이야기

"내가 본 댐 가운데 가장 마른 댐"이 무너졌다: 1928년 세인트프랜시스 댐 붕괴, 자정의 물벼락에 431명 넘게 숨진 미국 최악의 토목 참사

1928년 3월 12일 자정 직전, 완공 2년도 안 된 로스앤젤레스의 세인트프랜시스 댐이 무너져 4,700만㎥의 물이 87km를 쓸고 바다까지 갔어요. 그날 아침의 누수 점검, 단층 위에 놓인 기초, 멀홀랜드의 증언과 그 뒤 바뀐 댐 안전 제도까지 기록으로 따라가 봤어요.

텅 빈 저수지 바닥과 협곡 사이에 가운데 부분만 홀로 서 있는 무너진 세인트프랜시스 댐의 흑백 사진
붕괴 닷새 뒤인 1928년 3월 17일의 댐 터. 가운데 부분만 남았고, 서쪽 접합부는 통째로 쓸려 나가 비활성 상태의 샌프랜시스키토 단층이 드러났어요. · H.T. Stearns(USGS)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1928년 3월 12일 월요일 밤 11시 57분 30초, 로스앤젤레스의 전력 수신소 두 곳에서 전압이 뚝 떨어졌어요. 같은 순간 남캘리포니아에디슨(SCE)의 소거스 변전소에서는 변압기가 터졌어요. 도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64km 떨어진 샌프랜시스키토 협곡에서, 완공된 지 2년도 안 된 높이 56m의 콘크리트 댐이 무너지면서 그 위를 지나던 전선이 끊어진 거예요. 물은 다섯 시간 넘게 87km를 흘러 태평양까지 갔고, 그 길에서 적어도 431명이 숨졌어요. 20세기 미국 토목 사고 가운데 최악으로 꼽히고, 캘리포니아 역사에서 세 번째로 많은 목숨을 앗아 간 재난이에요.

더 기막힌 건 그날 아침이었어요. 댐 관리인이 새로 생긴 누수를 발견해 보고했고, 로스앤젤레스 수도국의 최고 책임자 윌리엄 멀홀랜드가 직접 와서 두 시간 동안 둘러본 뒤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돌아갔어요. 그로부터 열네 시간쯤 뒤에 댐이 사라졌어요.

도랑지기에서 수도국장이 된 윌리엄 멀홀랜드

초기 로스앤젤레스는 로스앤젤레스강에서 도랑(스페인어로 산하)을 따라 물을 끌어다 썼어요. 1878년 이 도랑을 관리하는 '산헤로'로 민간 수도 회사에 들어간 사람이 윌리엄 멀홀랜드예요. 그는 하루 일을 마친 뒤 수학, 수리학, 지질학 교과서를 혼자 공부해 지질학과 공학을 익혔고, 1886년 감독관이 됐어요. 1902년 시가 수도 사업을 직접 맡자 그대로 책임자가 됐고, 1911년 조직 이름이 수도공급국으로 바뀌면서 수석 엔지니어도 겸했어요.

멀홀랜드의 이름을 높인 건 1913년 완공한 로스앤젤레스 수로였어요. 오언스밸리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375km를 오직 중력만으로 물을 끌어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수로였고 예정된 기간과 예산 안에 끝났어요. 그사이 도시 인구는 1900년 10만 명 남짓에서 1910년 32만 명, 1920년 57만 6,673명으로 불었어요.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작은 저수지 일곱 개를 더 지었지만, 가뭄이 들거나 지진으로 수로가 끊겨도 버틸 큰 저수지가 필요했어요.

처음 후보지는 산페르난도밸리 북동쪽의 빅투정가 협곡이었어요. 하지만 멀홀랜드는 그곳 목장주들이 부르는 땅값을 시를 상대로 한 강도질로 여겼고, 매입을 접었어요. 그리고 12년 전 수로를 지을 때 둘러봤던, 연방 소유라 훨씬 싼 샌프랜시스키토 협곡으로 눈을 돌렸어요.

단층 위에 세운 계단 모양의 콘크리트 댐

협곡의 땅은 두 종류였어요. 서쪽 비탈의 중간 위쪽은 석고 줄이 섞인 붉은 역암과 사암이었고, 그 아래부터 바닥을 건너 동쪽 벽까지는 얇게 겹겹이 갈라지고 활석이 섞인 운모 편암이었어요. 두 암반이 만나는 선은 대체로 활동하지 않는 샌프랜시스키토 단층으로 봐요. 멀홀랜드는 1911년 연례 보고서에 동쪽 편암 면이 불안정하다고 적었지만, 공사 감독 스탠리 던햄은 나중에 검시 심리에서 자신이 지시한 시험에서는 동쪽 암반이 전체적으로 단단하게 나왔다고 증언했어요.

공사는 1924년 8월 첫 콘크리트를 부으며 시작됐어요. 설계는 1년 먼저 착공한 멀홀랜드 댐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현장에 맞게 고친 것이었어요. 1923년 계획은 강바닥에서 53m 높이에 저수량 약 3만 에이커피트(3,700만㎥)였지만, 1925년 3월에는 높이를 3m 올려 56m, 저수량 3만 8,000에이커피트(약 4,700만㎥)로 바뀌었어요. 높아진 수위를 막으려고 서쪽 능선 위에 길이 179m의 날개 둑을 새로 쌓아야 했어요. 하류 쪽 면은 높이 1.5m짜리 계단을 층층이 쌓은 모양이었고, 1926년 5월 4일 완공됐어요.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저수지와 협곡을 가로막은 곡선형 콘크리트 댐을 멀리서 찍은 흑백 사진
무너지기 전인 1927년 2월의 세인트프랜시스 댐과 저수지. · H.T. Stearns(USGS)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물을 채운 첫날부터 생긴 균열과 누수

저수지에 물을 채우기 시작한 건 1926년 3월 12일이에요. 온도 변화로 생기는 균열 몇 개와 접합부 아래로 스며 나오는 약간의 물이 보였어요. 멀홀랜드 댐 때 정한 방식대로 수축 이음매는 하나도 두지 않았어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큰 균열 두 개를 멀홀랜드와 부국장 하비 밴노먼이 살펴봤고, 이만한 댐이면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했어요. 4월 초 수위가 서쪽의 단층선에 닿자 곧바로 물이 새기 시작했어요. 다 막지 못한 물은 5.1cm 관으로 모아 댐 관리인 토니 하니시페거의 집까지 끌어가 생활용수로 썼어요.

1927년 5월에는 수위가 넘침 수로에서 0.91m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새는 물의 양은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이때 멀홀랜드가 한 말이 유명해요. 자신이 지었거나 본 모든 댐 가운데 이 크기로는 가장 마른 댐이었다는 거예요. 같은 달 27일 오언스밸리 주민들이 수로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는, 이른바 캘리포니아 물 전쟁이 다시 터졌고, 댐을 폭파하러 차 한 대가 오고 있다는 익명 전화까지 걸려 와 협곡에 경찰이 몰려들기도 했어요.

1927년 말에는 서쪽과 동쪽 접합부에서 위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균열이 하나씩 생겼어요. 두 균열 모두 산비탈 쪽이 더 넓었는데, 멀홀랜드는 수축 균열로 보고 뱃밥과 시멘트로 메웠어요. 1928년 2월 말에는 날개 둑 밑에서 초당 17L가 새기 시작했고 3월 첫 주에 양이 두 배쯤 늘었어요. 3월 7일 수위가 넘침 수로보다 7.6cm 낮은 곳까지 차자 멀홀랜드는 물을 더 채우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콘크리트 벽면을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굵은 균열을 한 남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흑백 사진
붕괴 뒤 남은 댐의 균열을 가리키는 남자. 1928년 3월 12일 붕괴 뒤에 찍은 사진이에요. · Los Angeles Daily News · CC BY 4.0 · Wikimedia Commons

3월 12일 아침, 흙탕물 누수 점검과 "안전하다"는 판단

3월 12일 아침 순찰을 돌던 하니시페거는 서쪽 접합부에서 새 누수를 발견했어요. 같은 자리에서 전에도 물이 샜던 데다, 물빛이 흙탕물이라 기초가 깎여 나가는 신호일 수 있었어요. 곧장 연락을 받은 멀홀랜드와 밴노먼이 와서 물줄기를 따라가 봤고, 흙탕물은 누수 자체가 아니라 새로 낸 진입로의 흙과 섞여서 생긴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두 사람이 어림한 누수량은 초당 57~85L였어요. 검시 심리에서 두 사람은 물줄기가 지켜보는 동안 두 번 갑자기 세졌던 점이 마음에 걸렸다고 증언했어요.

세 사람은 두 시간 동안 댐 곳곳을 살폈지만 큰 댐에서 흔한 수준 이상의 이상은 찾지 못했어요. 언젠가 손을 보긴 해야겠지만 당장 위험하지는 않다고 결론 내리고 멀홀랜드와 밴노먼은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어요.

자정 2분 30초 전, 높이 43m의 물벼락

붕괴를 보고 살아남은 목격자는 없어요. 마지막으로 온전한 댐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은 1발전소 목수 에이스 호프웰이었어요. 자정 10분쯤 전 오토바이로 댐을 지난 그는 2.4km쯤 위에서 엔진 소리 너머로 언덕에서 돌이 굴러가는 듯한 우르릉 소리를 들었어요. 오토바이를 세우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비탈을 살폈지만, 소리가 잦아들자 이 지역에 흔한 산사태라고 여기고 떠났어요.

댐은 순식간에 무너졌어요. 가운데 부분과 날개 둑 말고는 거의 남지 않았고, 서쪽 부분은 크고 작은 조각으로 부서져 물에 실려 갔어요. 가장 큰 조각은 약 9,000톤으로 1.2km 아래에서 발견됐어요. 70분이 채 안 돼 저수지는 거의 비었어요. 처음 물벼락의 높이는 43m였고, 400m 아래에 있던 하니시페거의 집을 가장 먼저 덮쳤을 것으로 봐요. 그와 함께 살던 여성의 시신이 옷을 다 갖춰 입은 채 댐 아래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에서 발견돼, 두 사람이 붕괴 직전 댐을 살피러 나왔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왔어요. 하니시페거와 여섯 살 아들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어요.

협곡 바닥에 비스듬히 놓인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멀리 보이는 날개 둑의 흑백 사진
댐에서 약 800m 아래까지 떠내려간 서쪽 접합부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길이 약 19m, 높이 9m, 폭 16m 크기예요. 멀리 날개 둑이 보여요. 1928년 3월 17일. · H.T. Stearns(USGS)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붕괴 5분 뒤 높이 37m로 줄어든 물은 평균 시속 29km로 2.4km를 내려가 2발전소를 부쉈고, 근처에 살던 직원과 가족 67명 가운데 64명이 숨졌어요. 새벽 1시 무렵 높이 17m가 된 물은 소거스 변전소를 무너뜨렸고, 카운티 경계 근처 강변에 차려진 SCE 공사 캠프를 덮쳐 작업자 150명 가운데 84명이 숨졌어요. 혼란 속에서 SCE는 경보를 내리지 못했어요.

경보를 퍼뜨린 건 사람들이었어요. 새벽 1시 30분 직전 산타클라라강 계곡의 한 전화 교환원이 장거리 전화 회사로부터 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오토바이 경찰관에게 알린 뒤 위험 지역의 집집마다 전화를 걸었어요. 경찰관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고, 보안관 대리는 사이렌을 울리며 물을 향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어요. 물은 필모어, 바즈데일, 산타폴라를 덮친 뒤 새벽 5시 30분쯤 벤투라 남쪽 바다로 들어갔어요. 그때 물길의 폭은 3km 가까이 됐고, 여전히 시속 9.7km로 흐르고 있었어요.

홍수에 휩쓸려 엿가락처럼 휘고 뒤틀린 철로가 들판에 놓인 흑백 사진
캐스테이크정크션과 피루 사이에서 홍수에 뒤틀린 철로. · U.S. Geological Survey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열두 개가 넘는 조사와 엇갈린 붕괴 시나리오

조사는 적어도 열두 건이었고, 그 가운데 여덟 건이 붕괴 뒤 첫 주말까지 시작됐어요. 서두른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의회에는 후버 댐 건설 자금을 담은 스윙-존슨 법안이 올라가 있었고, 세인트프랜시스 저수지보다 700배 큰 저수지를 만들 비슷한 형식의 댐이 이 사고로 발목을 잡힐 수 있었거든요. 법안은 결국 1928년 12월 21일 쿨리지 대통령의 서명을 받았어요.

주지사 위원회는 붕괴 11일 만인 3월 24일 79쪽 보고서를 냈어요. 서쪽 접합부의 붉은 역암이 마른 상태에서도 약하고 젖으면 암석의 성질을 거의 잃을 만큼 물러진다며, 물이 기초에 닿지 않게 막지 못하는 한 이 댐의 붕괴는 피할 수 없었다고 봤어요. 시의회 위원회도 결론은 같았어요. 댐의 형식과 크기, 콘크리트 강도는 충분했고 원인은 결함 있는 기초라고요. 댐 가운데에 달린 자동 수위 기록계에는 붕괴 40분 전까지 수위 변화가 없다가 그 뒤 조금씩 늘어나는 하강이 찍혀 있었어요.

지질학자 베일리 윌리스와 토목 기술자 칼 그런스키 부자는 다르게 봤어요. 동쪽 산비탈 자체가 오래된 산사태 덩어리였고, 저수지 물이 편암 깊숙이 스며들어 그 덩어리가 미끄러지며 댐을 밀었다는 거예요. 그런스키 쪽은 댐 아래로 스민 물이 위로 밀어 올려 댐의 실제 무게를 줄이는 '양압력'도 원인으로 꼽았어요. 붕괴 뒤 측량에서 날개 둑 일부가 지을 때보다 5~15cm 높아져 있었는데, 젖으면 부푸는 서쪽 역암과 밀려드는 동쪽 산 사이에서 댐이 바이스에 물린 꼴이었다는 설명이에요. 오늘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가설도 동쪽 접합부가 산사태로 먼저 무너졌다는 쪽이에요. 다만 그 산사태 흔적은 1920년대 지질학자 대부분이 알아보기 어려웠고, 실제로 당대 최고 전문가 두 사람이 현장을 따로 살폈지만 문제를 찾지 못했어요.

홀로 서 있는 댐 가운데 부분 앞에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들이 쓰러져 있고 사람들이 바닥을 걷는 흑백 사진
붕괴 뒤 유일하게 서 있던 가운데 부분과, 그 앞에 쓰러진 동쪽 부분의 조각들. ·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오류가 있었다면 그 사람은 나" 멀홀랜드의 증언

검시 심리에서 멀홀랜드는 이 자리가 몹시 고통스럽다며, 이번 일에서 부러운 건 죽은 사람들뿐이라고 말했어요. 이어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자신에게 책임을 지우라며, 인간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면 그 인간은 자신이었다고 증언했어요. 배심원단은 댐 터의 기초와 댐 형식을 정한 공학적 판단에 오류가 있었고 그 책임은 수도공급국과 수석 엔지니어에게 있다고 봤어요. 다만 당시 누구도 암반의 불안정성을 알 수 없었다며 형사 책임은 묻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대한 댐의 건설과 운영을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의 판단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어요.

멀홀랜드는 1928년 12월 1일 물러났고, 밴노먼이 뒤를 이었어요. 그는 자문 엔지니어로 남아 월 500달러를 받았지만 점점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다 1935년 79세로 세상을 떠났어요. 정확한 희생자 수는 지금도 몰라요. 1928년 8월 공식 집계는 385명이었지만, 바다로 쓸려 가 찾지 못한 사람이 많았고 유해는 1950년대 중반까지 몇 해마다 발견됐어요. 1992년에도 뉴홀 근처 땅속 깊은 곳에서 희생자의 유해가 나왔어요. 현재 추정치는 최소 431명이고, 현장의 캘리포니아 사적 표지판에는 450명이 넘게 숨졌다고 적혀 있어요.

무너진 댐이 바꾼 댐 안전법과 기술사 면허

가장 큰 변화는 제도였어요. 그때까지 자체 엔지니어링 부서를 둔 시는 댐 규제를 완전히 면제받았는데, 캘리포니아 의회는 이 면제를 없앴어요. 1929년 8월 14일부터 주 공공사업부가 높이 7.6m가 넘거나 6만 2,000㎥ 넘게 물을 담는 연방 소유가 아닌 모든 댐을 검토하고 유지·운영까지 감독하게 됐어요. 같은 해 설계를 아무 규제 없이 맡기는 것이 공공의 위험이라는 판단에 따라 토목 기술자 등록 위원회를 만들어 면허 제도도 시작했어요.

거의 쌍둥이였던 멀홀랜드 댐 아래 주민들은 저수지를 비우고 댐을 없애라고 청원했어요. 여러 위원회가 살펴본 끝에 이 댐도 양압력을 덜어 줄 장치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왔고, 저수량을 4,000에이커피트(약 490만㎥) 이하로 묶은 채 1933~1934년 하류 쪽 면에 흙 25만㎥를 덮었어요. 세인트프랜시스 댐은 다시 짓지 않았어요. 대신 1934년 근처에 더 작은 부케 저수지가, 1973년에는 그 9배를 담는 캐스테이크 댐이 생겼어요. 기자가 '묘비'라고 부른 가운데 부분은 구경꾼이 떨어져 숨진 뒤 1929년 5월 다이너마이트로 넘어뜨렸어요.

덤불이 자란 협곡 비탈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회색 콘크리트 잔해를 컬러로 찍은 사진
2012년 샌프랜시스키토 협곡에 지금도 흩어져 있는 댐의 콘크리트 잔해. · Chevy111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댐 터는 캘리포니아 사적 919호예요. 2019년 3월 12일, 붕괴 91년이 되는 날 서명된 법으로 세인트프랜시스 댐 참사 국가기념물과 국가추모지가 지정돼 143ha가 보호 구역이 됐고, 확인된 희생자 이름을 새길 추모 벽 설계안이 2023년 4월 발표됐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세인트프랜시스 댐 붕괴

완공일인 1926년 5월 4일부터 붕괴까지는 678일, 물을 채우기 시작한 날부터는 꼭 2년인 731일이었어요. 저수량 3만 8,000에이커피트는 1에이커피트를 1,233.5㎥로 바꾸면 약 4,690만㎥이고, 붕괴 때 쏟아진 124억 갤런도 약 4,700만㎥로 거의 같아요. 이 물이 70분 안에 빠졌다면 평균 초당 1만 1,000㎥ 넘게 흘러나간 셈이에요.

밤 11시 57분 30초에 무너져 새벽 5시 30분쯤 87km 아래 바다에 닿았으니, 걸린 시간은 약 5시간 32분, 평균 속도는 시속 약 16km예요. 처음 5분 동안은 시속 29km였고 바다에 닿을 때도 시속 9.7km였어요. 사람이 뛰는 속도보다 빠른 물이 몇 시간 동안 계곡을 내려온 거예요. 2발전소 근처에서는 67명 가운데 64명, SCE 캠프에서는 150명 가운데 84명이 숨졌어요.

항목기록환산·비교
댐 높이185피트약 56m
저수량3만 8,000에이커피트약 4,700만㎥
처음 물벼락 높이140피트약 43m
붕괴 5분 뒤120피트, 시속 18마일약 37m, 시속 29km
바다까지 거리54마일약 87km, 평균 시속 약 16km
붕괴 당일 아침 누수초당 2~3세제곱피트초당 57~85L
완공부터 붕괴까지1926.5.4 ~ 1928.3.12678일
희생자공식 385명(1928년 8월)현재 추정 최소 431명
댐이나 저수지 아래 계곡에서 지낼 때는 대피 경보와 대피 경로를 미리 확인해 두세요. 홍수 경보가 나오면 물길을 따라 내려가지 말고 즉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해요. 세인트프랜시스 댐의 물은 사람이 달리는 속도보다 빨랐어요.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