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8월 29일 늦은 오후, 퇴근 시간을 앞둔 캐나다 퀘벡시 남쪽 세인트로렌스강 위에서 짓던 다리의 남쪽 절반이 통째로 강물 속으로 내려앉았어요. 남쪽 팔과 중앙부 일부가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5초였어요. 그날 다리 위에서 일하던 노동자 86명 가운데 75명이 숨졌고, 살아남은 사람도 모두 다쳤어요. 영어 위키백과는 이 사고를 세계 최악의 교량 건설 사고라고 적고 있어요.
이 다리가 무너진 이유는 폭풍도 지진도 아니었어요. 다리 스스로의 무게, 곧 고정 하중이 부재가 버틸 수 있는 힘을 크게 넘어섰기 때문이에요. 설계 초기에 한 계산은 설계가 끝난 뒤에도 제대로 다시 검토되지 않았고, 현장에서 휘어지는 부재를 본 젊은 기술자의 경고는 편지와 전보를 거치는 사이에 시간을 놓쳤어요. 공교롭게도 오늘은 10월 17일, 이 다리 위로 첫 열차가 지나간 1917년 10월 17일에서 꼭 109년이 되는 날이에요.
50년 넘게 미뤄진 세인트로렌스강 다리
다리가 놓이기 전, 남쪽 강변의 레비에서 북쪽 강변의 퀘벡시로 건너가려면 배를 타거나 겨울에 강이 얼었을 때 생기는 얼음 다리를 걸어야 했어요. 이 자리에 다리를 놓자는 이야기는 1852년부터 나왔고 1867년, 1882년, 1884년에도 다시 논의됐어요. 5년 동안 총리가 네 번 바뀔 만큼 정치가 불안했던 시기가 지나고, 퀘벡 이스트 선거구 하원의원 윌프리드 로리에가 1896년 자유당을 이끌고 집권하면서 사업에 속도가 붙었어요. 로리에는 1911년 물러날 때까지 이 다리를 밀어붙였어요.
다리를 맡은 퀘벡 다리 회사는 1887년 의회 법률로 처음 세워졌고, 1891년과 1897년 두 차례 되살아났어요. 1903년에는 채권 발행 한도가 600만 달러로 늘고 회사 이름도 퀘벡 다리·철도 회사(QBRC)로 바뀌었어요. 같은 해 채권을 나라가 보증하는 법률까지 만들어졌어요. 정치적으로도 얽힌 사업이었어요. 회사 사장 시몽나폴레옹 파랑은 1894년부터 1906년까지 퀘벡시 시장이었고, 1900년부터 1905년까지는 퀘벡주 총리를 겸했어요.

91m짜리 경험으로 549m 다리를 맡은 사람들
이 다리는 캔틸레버 방식이었어요. 양쪽 교각에서 팔을 뻗듯 철골 구조를 강 한가운데로 내밀고, 두 팔 사이에 중앙 구조물을 얹는 방식이에요. 계획한 경간, 곧 교각과 교각 사이 거리는 세계 어느 다리보다 길었어요. 그런데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 에드워드 호어는 길이 300피트(약 91m)가 넘는 캔틸레버 구조를 다뤄 본 적이 없었어요.
감독 체계도 흔들렸어요. 정부 철도·운하부의 수석 엔지니어 콜링우드 슈라이버를 돕던 교량 기술자 R. C. 더글러스는 시공사가 낸 계산에 반대했다가 1903년 7월 9일 자리에서 밀려났어요. 슈라이버는 다른 교량 전문가를 붙여 달라고 요청했지만 1903년 8월 15일 내각이 사실상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 뒤로 공사는 회사의 자문 엔지니어 시어도어 쿠퍼가 전적으로 맡게 됐어요. 철골 설계는 피닉스 브리지 컴퍼니의 수석 설계자 피터 슐랍카가 했어요.
기록에 남은 핵심 문제는 한 문장으로 요약돼요. 설계 초기에 한 예비 계산이, 설계가 완성된 뒤에 제대로 다시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1904년 무렵 남쪽 절반이 모습을 갖춰 가는 동안에도 이 계산은 그대로였어요.
휘어지는 부재와 늦게 도착한 경고 전보
1907년 여름 다리가 완공에 가까워지자, 노먼 매클루어가 이끄는 회사 현장 기술진은 이미 설치한 주요 부재가 점점 더 뒤틀리는 것을 발견했어요. 다리의 자기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그 무게가 부재가 버틸 수 있는 힘을 훨씬 넘고 있었던 거예요. 매클루어는 걱정이 커져 쿠퍼에게 거듭 편지를 썼지만, 쿠퍼는 처음에는 사소한 문제라고 답했어요. 피닉스 쪽 관계자들은 부재가 설치되기 전부터 이미 휘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8월 27일, 매클루어는 그 설명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됐어요. 위키백과는 경험 많은 엔지니어였다면 전보를 쳤을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 매클루어는 편지를 쓰고 이틀 뒤 뉴욕으로 가서 쿠퍼를 직접 만났어요. 그제야 쿠퍼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데 동의하고 피닉스 브리지 컴퍼니에 곧바로 전보를 보냈어요.
"사실관계를 충분히 검토하기 전까지 다리에 하중을 더 올리지 말 것." 매클루어를 만난 쿠퍼가 피닉스 브리지 컴퍼니에 보낸 전보의 내용이에요. 이 지시는 너무 늦기 전에 퀘벡 현장까지 전달되지 못했어요.
그날 오후 퇴근 무렵, 4년 동안 지어 온 남쪽 팔과 중앙부 일부가 15초 만에 강으로 무너졌어요. 그사이 두 엔지니어는 피닉스 사무실로 가 있었어요.

86명 중 75명, 카나와케 모호크족 철골공 33명
희생자 가운데 33명은 몬트리올 근처 카나와케 보호구역에서 온 모호크족 철골 노동자였어요. 35명이라고 적은 자료도 있어요. 이들은 카나와케에 묻혔고, 무덤에는 강철 빔으로 만든 십자가가 세워졌어요. 한 공동체에서 이만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은 이 사고가 남긴 가장 깊은 상처였어요.
100년 가까이 지난 2006년 8월 29일, 카나와케에서는 1907년에 숨진 모호크족 남성 33명을 기리는 1년 동안의 추모 행사가 시작됐어요. 1년 뒤인 2007년 8월 29일에는 다리의 레비 쪽에 희생자 이름을 새긴 콘크리트 구조물이 봉헌됐고, 카나와케에는 다리를 본뜬 강철 모형이 세워졌어요.

왕립 조사위원회가 지목한 두 엔지니어
사고 이튿날인 8월 30일 조사위원회가 임시로 꾸려졌고, 8월 31일 정식 왕립 조사위원회가 됐어요. 위원은 몬트리올의 헨리 홀게이트, 맥길대 강사이기도 했던 J. G. G. 케리, 토론토대 공대 학장 존 갤브레이스, 이렇게 세 엔지니어였어요. 위원회는 필라델피아의 교량 자문 엔지니어 C. C. 슈나이더의 사후 분석도 받아들였는데, 이는 1903년에 슈라이버가 요청했던 바로 그 외부 전문가 검토가 사고 뒤에야 이뤄진 셈이었어요.
1908년 2월 20일 나온 보고서는 15개 결론을 담았어요. 무너진 현재(弦材)를 설계한 사람은 슐랍카였고, 그 설계를 공식적으로 검토하고 승인한 사람은 쿠퍼였으며, 이번 실패는 이 두 엔지니어의 판단 착오 말고 다른 원인으로 돌릴 수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경험 있는 교량 기술자를 수석 엔지니어로 앉히지 않은 회사의 결정도 실수였고, 그 때문에 모든 공정의 감독이 느슨하고 비효율적이었다고 지적했어요. 쿠퍼는 형사 처벌을 받지 않았고, 슐랍카도 처벌을 피했을 것으로 여겨져요.
| 조사위원회 결론(요지) | 내용 |
|---|---|
| 무너진 현재의 설계자 | 피닉스 브리지 컴퍼니 설계 엔지니어 피터 슐랍카 |
| 설계를 검토·승인한 사람 | QBRC 자문 엔지니어 시어도어 쿠퍼 |
| 원인 | 두 엔지니어의 판단 착오 외에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음 |
| 회사의 책임 | 경험 있는 교량 기술자를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하지 않아 감독이 느슨해짐 |
| 처벌 | 쿠퍼는 형사 처벌을 받지 않음 |
1916년 두 번째 붕괴, 이번엔 들어 올리던 중앙 경간
조사가 끝나자 새 다리 공사가 시작됐어요. 캐나다 퍼시픽 철도 출신의 H. E. 보틀레가 사장 겸 수석 엔지니어를 맡았고, 영국 포스 브리지 건설에 참여했던 모리스 피츠모리스, 시카고의 랠프 모제스키가 함께했어요. 설계는 여전히 긴 캔틸레버 경간 하나로 강을 건너는 방식이었지만, 구조는 훨씬 육중해졌어요.
1916년 9월 11일, 강 위로 중앙 경간을 들어 올리던 중 경간이 강으로 떨어져 노동자 13명이 숨졌어요. 중앙부 시공을 맡은 엔지니어이자 연방정부 검사관이던 프란츠 리히텐베르크가 사고 6주 전에 이미 문제를 수석 엔지니어에게 알렸다는 기록이 있어요. 1차 세계대전 중이라 독일의 사보타주를 의심하는 보도도 나왔지만, 조사해 보니 원인은 들어 올리는 장비의 주물 부품 하나가 부서진 것이었어요.


재공사는 거의 곧바로 시작됐어요. 전쟁 때문에 강철 수요가 몰렸지만 정부가 특별 허가를 내줬어요. 다리는 1917년 9월 완성됐고, 10월 17일 첫 열차가 퀘벡에서 레비로 건넜어요. 1917년 12월 3일 철도 운행이 정식으로 시작됐는데, 위키백과 첫머리는 다리가 최종적으로 개통한 해를 1919년으로 적고 있어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무장 군인과 자치령 경찰이 다리를 지키며 통행증을 검사했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퀘벡 다리
두 번의 붕괴로 숨진 사람은 1907년 75명과 1916년 13명을 합해 88명이에요. 총공사비는 2,300만 달러였어요. 아래 표의 단위 변환과 비율은 위키백과에 나온 숫자로 직접 계산한 값이에요.
| 항목 | 기록 | 계산해 보면 |
|---|---|---|
| 최대 경간 | 549m(1,801피트) | 캔틸레버 팔 177m × 2 + 중앙 구조물 195m = 549m |
| 수석 엔지니어 경험 | 300피트(약 91m) 이하 캔틸레버 | 계획 경간 1,800피트는 그 6배 |
| 1907년 다리 위 노동자 | 86명 중 75명 사망 | 약 87.2% |
| 두 차례 붕괴 사망자 | 75명 + 13명 | 88명 |
| 1907년 붕괴 시간 | 15초 | 공사 4년 만의 일 |
| 사고~조사 보고서 | 1907년 8월 29일~1908년 2월 20일 | 175일 |
| 다리 전체 길이·높이 | 987m, 104m | 약 3,238피트, 약 341피트 |
| 2024년 연방정부 재매입 | 1달러, 25년간 보수비 10억 달러 약속 | 한 해 평균 약 4,000만 달러 |
549m라는 경간은 1929년 앰배서더 다리가 완공될 때까지 모든 형식을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긴 경간이었어요. 캔틸레버 다리로만 따지면 지금도 세계 최장이에요.
기술사 제도와 아이언 링, 사고가 남긴 것
이 사고는 감독이 허술한 공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줬어요. 조사위원이었던 갤브레이스와 여러 엔지니어는 1925년 무렵 오늘날 전문 엔지니어(P.Eng) 단체로 알려진 조직을 만드는 데 나섰어요. 캐나다에서 전문 엔지니어가 되려면 윤리 시험을 통과하고, 인물 보증을 받고, 공인 엔지니어 밑에서 최소 4년의 실무 경력을 쌓아야 해요. 일하는 주에 등록해야 하고, '전문 엔지니어'라는 호칭은 그 단체 회원만 쓸 수 있어요.
캐나다 공대 졸업생들은 1925년부터 쇠로 만든 반지, 아이언 링을 끼기 시작했어요. 무너진 다리의 철로 초기 반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위키백과는 이를 대중적인 속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어요. 다리와 반지를 잇는 이야기는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에요.
녹슨 다리를 1달러에 사고판 이유
다리는 원래 철도용으로 지어졌지만, 전차 선로와 두 철로 가운데 하나가 차차 자동차 차선과 보행·자전거 길로 바뀌었어요. 차선은 1929년 하나, 1949년 하나, 1993년 하나가 더해져 지금은 세 개예요. 1970년에는 바로 상류에 피에르 라포르트 현수교가 열려 고속도로 차량을 넘겨받았어요. 1993년 7월 22일 추밀원 명령으로 캐나다 정부 철도가 국영 기업인 캐나다 국영철도(CN)에 1캐나다달러에 팔리면서 다리도 CN 소유가 됐고, CN이 1995년 11월 민영화되면서 다리도 민간 소유가 됐어요.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국가 사적지로 지정됐어요.
문제는 녹이었어요. 다리 표면의 약 60%가 녹으로 덮였다는 추정이 나왔고, 캐나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2015년 이 다리를 캐나다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사적지 10곳에 넣었어요. 2014년 11월 퀘벡시, 레비시, 퀘벡주, 연방정부가 도색·복원비 추정액 2억 달러의 절반을 내겠다고 했지만, CN은 이 작업을 미관용이라 보고 같은 금액을 내지 않았어요. 결국 2024년 5월 10일 연방정부가 다시 1달러에 다리를 사들이고, 25년 동안 보수와 유지에 10억 달러를 쓰겠다고 약속했어요.

퀘벡 다리 붕괴 자주 묻는 질문
- 퀘벡 다리는 왜 무너졌나요?
- 다리 자체의 무게가 부재가 버틸 수 있는 힘을 크게 넘었기 때문이에요. 설계 초기 계산이 설계 완료 뒤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고, 왕립 조사위원회는 설계자 슐랍카와 승인자 쿠퍼의 판단 착오를 원인으로 지목했어요.
- 퀘벡 다리 붕괴로 몇 명이 숨졌나요?
- 1907년 붕괴 때 다리 위 노동자 86명 중 75명이 숨졌고, 1916년 두 번째 붕괴 때 13명이 숨져 모두 88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 퀘벡 다리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인가요?
- 경간 549m는 캔틸레버 다리 가운데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길어요. 모든 형식을 통틀어서는 1929년 앰배서더 다리가 완공되면서 1위 자리를 내줬어요.
- 엔지니어 아이언 링은 무너진 퀘벡 다리 철로 만들었나요?
- 그런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위키백과는 이를 대중적인 속설로 소개해요. 확인된 사실로 보기는 어려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