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5월 31일 금요일 오후 2시 50분에서 55분 사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산속의 흙댐 하나가 무너졌어요. 댐 뒤 코니모 호수에 담겨 있던 물은 1,455만㎥였어요. 이 물이 좁은 골짜기를 따라 강 길이로 23km 아래에 있는 공업 도시 존스타운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57분이었어요. 물과 잔해가 뒤섞인 벽은 곳에 따라 높이 18m, 시속 64km로 도시를 덮쳤어요.
이날 숨진 사람은 2,208명이에요. 인명 피해로 따지면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돌발 홍수예요. 그런데 이 댐은 그냥 낡은 댐이 아니었어요. 피츠버그의 철강·석탄·철도 부호들이 회원으로 있던 사우스포크 낚시·사냥 클럽의 전용 호수를 막고 있던 댐이었고, 클럽은 댐을 손보면서 위험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그러고도 법적 책임은 끝내 지지 않았어요.
강이 만나는 골짜기 도시 존스타운
존스타운은 1800년 스위스 이민자 조지프 존스가 스토니크리크강과 리틀코니모강이 만나 코니모강이 되는 자리에 세운 도시예요. 1836년 펜실베이니아 운하가 지나가며 번성하기 시작했고, 1850년대 펜실베이니아 철도와 캠브리아 제철소가 들어서며 공업 도시가 됐어요. 1889년에는 웨일스와 독일 이민자 노동자가 많이 사는 인구 3만 명의 도시였고 강철 품질로 이름이 났어요.
지형은 홍수에 약했어요. 좁고 가파른 코니모 골짜기와 동쪽의 앨러게니산맥 때문에 도시는 강가에 바짝 붙어 자랐고, 골짜기에는 비와 눈 녹은 물이 많이 흘러들었어요. 게다가 제철소에서 나온 슬래그를 강가에 부어 땅을 넓히는 바람에 강바닥이 좁아졌어요. 도시 바로 아래 코니모강은 약 16km 동안 가파른 산비탈 사이를 흐르는데, 길가 안내판에는 이 구간이 로키산맥 동쪽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깊은 강 협곡이라고 적혀 있어요.
운하 저수지에서 부자들의 휴양 호수로 바뀐 사우스포크 댐
사우스포크 댐은 펜실베이니아주가 1838년부터 1853년까지 주를 가로지르는 운하망의 일부로 지은 흙댐이에요. 댐 뒤 코니모 호수가 운하에 물을 대는 저수지였어요. 철도가 운하를 밀어내자 주는 운하를 펜실베이니아 철도에 팔았고, 철도 회사는 댐과 호수를 다시 개인에게 팔았어요. 헨리 클레이 프릭이 이끄는 피츠버그 투자자들이 이 저수지를 사들여 부유한 지인들을 위한 전용 휴양 호수로 바꿨어요. 회원은 철강·석탄·철도 업계의 부호 50명이 넘었고, 상당수가 카네기 철강과 사업이나 사교로 이어져 있었어요.
클럽은 댐 꼭대기에 마차가 다닐 길을 내려고 높이 22m였던 댐을 0.91m 낮췄고, 물이 넘쳐 빠지는 여수로에는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물망을 달았어요. 원래 댐 바닥에 있던 방류관과 밸브는 이미 고철로 팔려 나간 뒤였는데 다시 달지 않았어요. 비상시 호수 수위를 낮출 방법이 없었던 거예요. 호수는 존스타운보다 140m 높은 곳에 있었고, 길이 약 3.2km, 폭 약 1.6km, 댐 근처 깊이 18m였어요. 댐은 높이 21m, 길이 284m였어요.

기록적인 폭우와 끝내 전달되지 않은 경고
5월 28일 네브래스카와 캔자스 위에 생긴 저기압은 이틀 뒤 펜실베이니아 서부에 닿았을 때 그 지역에서 기록된 가장 큰 폭우가 돼 있었어요. 미 육군 통신대는 24시간 동안 150~250mm의 비가 내렸다고 추정했어요. 5월 30일 밤 작은 개울들이 나무를 뽑아 버릴 만큼 불어났고 전신선과 철로가 끊겼어요.
5월 31일 아침, 댐 위 언덕의 농가에서 눈을 뜬 클럽 회장 일라이어스 웅거는 호수 물이 댐 꼭대기에 거의 닿은 것을 봤어요. 그는 사람들을 모아 쇠창살과 부서진 물고기 덫에 잔해가 걸린 여수로를 뚫으려 했고, 다른 사람들은 댐 꼭대기보다 낮은 서쪽 끝에 도랑을 팠어요. 꼭대기에 흙을 쌓아 높이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어요. 클럽 기술자 존 파크는 댐 끝을 잘라 물길을 하나 더 내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오히려 붕괴를 앞당길 거라 보고 그만뒀어요.
웅거의 지시로 파크는 두 번이나 말을 타고 이웃 마을 사우스포크의 전신국으로 가서 존스타운에 위험을 알리는 전보를 보내게 했어요. 다만 직접 전신탑까지 가지는 않고 사람을 대신 보냈어요. 경고는 끝내 존스타운 당국에 전달되지 않았어요. 댐이 버티지 못할 거라는 헛경보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탓에, 서둘러 전할 만큼 위험하다고 여긴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오후 1시 30분쯤 손을 놓고 양쪽 높은 곳으로 물러났어요. 그 무렵 존스타운 시내는 이미 길바닥 물이 3m까지 차올라 집 안에 갇힌 사람도 있었어요.

댐 붕괴에서 존스타운까지 57분, 골짜기 마을들의 기록
목격자들은 댐이 무너지기 시작한 뒤 호수가 35~45분 만에 텅 비었다고 했지만, 현대 댐 붕괴 컴퓨터 모델로는 대부분의 물이 빠지는 데 약 65분이 걸렸을 것으로 봐요. 첫 피해 마을은 바로 아래 사우스포크였어요. 높은 곳에 있었고 사람들이 물이 넘치는 걸 보고 언덕으로 뛰어 올라가, 집 20~30채가 쓸려 가고 4명이 숨졌어요.
물은 나무와 집과 가축을 쓸어 담으며 내려갔어요. 높이 24m 철도 돌다리인 코니모 고가교에 잔해가 걸려 잠시 막혔지만, 7분도 안 돼 다리가 무너졌어요. 막혔던 사이 물의 낙차가 다시 커져, 아래로는 더 거세고 갑작스러운 물결이 내려갔어요. 고가교 1.6km 아래 마을 미네랄포인트에는 약 30가구가 한 길에 살았는데, 홍수 뒤에는 건물도 겉흙도 속흙도 없이 맨 암반만 남았고 약 16명이 숨졌어요. 2009년 연구는 좁은 골짜기를 지난 물의 유량이 초당 1만 2,000㎥를 넘었다고 봤어요. 하구의 미시시피강 유량(초당 7,000~2만㎥)과 견줄 만한 양이에요.
다음은 이스트코니모였어요. 높은 곳에서 본 한 목격자는 물이 잔해에 덮여 거의 보이지 않았고 '거대한 언덕이 구르고 또 구르는 것' 같았다고 했어요. 철도 조차장에 기관차를 세워 두고 있던 기관사 존 헤스는 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기관차를 후진시켜 기적을 계속 울리며 마을로 달렸어요. 그 경고로 많은 사람이 높은 곳에 올랐지만, 열차에 발이 묶인 승객 약 25명을 포함해 적어도 50명이 숨졌어요. 헤스는 물에 떠밀린 기관차와 함께 살아남았어요. 존스타운 바로 위 우드베일에서는 홍수가 캠브리아 제철소를 덮치며 화차와 가시철사를 휩쓸었고, 주민 1,100명 가운데 314명이 숨졌어요.

댐이 무너진 지 57분 뒤 물은 존스타운에 닿았어요. 높은 곳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집과 일터에서 물을 맞았어요. 잔해에 깔린 사람이 많았고, 상류 철사 공장에서 쓸려 온 가시철사에 걸린 사람도 있었어요. 다락이나 지붕, 떠다니는 잔해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몇 시간을 기다려서야 구조됐어요. 변호사 제임스 월터스는 자기 집을 탄 채 떠내려가다 앨마 홀에 부딪혀 2층 사무실로 내동댕이쳐졌는데, 그곳 위층에는 약 200명이 피해 있었어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월터스를 대표로 뽑아 질서를 잡았어요.


돌다리에 쌓인 잔해 12ha, 사흘 동안 탄 불
존스타운 한가운데에는 펜실베이니아 철도가 코니모강을 건너는 튼튼한 아치형 돌다리가 있었어요. 휘어진 레일, 화차, 통째로 떠내려온 건물, 희생자의 시신까지 섞인 잔해가 이 다리에 걸려 임시 댐이 됐어요. 막힌 물은 스토니크리크강을 따라 거꾸로 밀려 올라갔다가, 중력에 끌려 다시 내려오며 다른 방향에서 도시를 한 번 더 덮쳤어요.
더 끔찍한 일은 그다음이었어요. 다리에 쌓인 잔해에 불이 붙었고, 떠밀려 와 잔해에 갇혀 있던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80명이 그 불 속에서 숨졌어요. 불은 사흘 동안 탔어요. 물이 빠진 뒤 다리 앞 잔해 더미는 넓이 12ha, 높이 21m에 이르렀어요. 제철소에서 쓸려 온 가시철사가 잔해와 엉켜 있어 치우는 데 석 달이 걸렸고, 결국 다이너마이트까지 썼어요. 조지 리스 가족은 반 시간쯤 떠다니던 집이 다리 앞 잔해에 걸린 덕분에 지붕 위 8명이 모두 빠져나왔어요.


2,209명에서 2,208명으로, 희생자 기록이 말하는 것
처음 집계된 사망자는 2,209명이었고, 당시 미국에서 민간인이 가장 많이 숨진 재난이었어요. 이 숫자는 나중에 하나 줄었어요. 역사가 데이비드 매컬로가 짚었듯, 숨진 것으로 처리된 리로이 템플이 11년 뒤 존스타운에 나타나 돌다리 잔해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골짜기를 걸어 나간 뒤 매사추세츠주 베벌리로 옮겨 살았다고 밝혔기 때문이에요. 그 뒤 공식 사망자는 2,208명이 됐어요.
존스타운 지역 유산 협회가 모은 기록에 따르면 시신은 멀리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늦게는 1911년에도 발견됐어요. 99가구가 온 가족을 잃었고 그중 아이가 396명이었어요. 아내를 잃은 남자 198명, 남편을 잃은 여자 124명, 고아가 된 아이 98명이 남았어요. 희생자의 3분의 1인 777명은 끝내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그랜드뷰 묘지에 묻혔어요.

공학자 조사 보고서와 '신의 행위' 판결
홍수 닷새 뒤인 6월 5일 미국 토목학회는 저명한 수리 기술자 제임스 B. 프랜시스가 이끄는 4인 조사위원회를 꾸렸어요. 위원회는 현장을 둘러보고 원래 설계와 보수 내역을 검토했으며 목격자 면담과 지형 측량, 수문 계산을 했어요. 보고서는 1890년 1월 15일 완성됐지만 봉인됐어요. 위원 맥스 베커는 소송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취지로 발표를 미루겠다고 말했고, 보고서는 재난 2년 뒤인 1891년 6월에야 학회지에 실렸어요. 그 사이 앤드루 카네기의 옛 동업자 윌리엄 신이 학회장이 됐다는 점도 기록에 남아 있어요.
보고서는 댐이 원래 설계대로 유지됐더라도 무너졌을 거라고 결론 냈어요. 이 결론은 나중에 반박됐어요. 2016년 발표된 수리 분석은 클럽이 댐을 최대 0.91m 낮추고 바닥 방류관을 다시 달지 않은 탓에 댐이 안전하게 내보낼 수 있는 물의 양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확인했어요. 댐을 낮추면서 주 여수로의 능력이 크게 줄었고, 서쪽 끝에 있던 비상 여수로는 사실상 제 기능을 잃었어요.
법정에서도 클럽은 이겼어요. 변호를 맡은 녹스 앤드 리드 법률회사의 두 동업자 필랜더 녹스와 제임스 헤이 리드는 둘 다 클럽 회원이었어요. 이들은 댐 붕괴가 '신의 행위', 즉 자연재해라고 주장해 받아들여졌어요. 생존자들은 어떤 법적 보상도 받지 못했어요. 대신 프릭을 비롯한 회원 절반가량이 구호 성금으로 수천 달러씩 냈고, 앤드루 카네기는 도시에 새 도서관을 지어 줬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존스타운 대홍수
기록에 나온 숫자를 단위 환산과 나눗셈으로 다시 보면 이 홍수의 규모가 감각으로 와닿아요. 표의 '계산해 보면' 칸은 위키백과 기록의 숫자로 직접 계산한 값이에요.
| 항목 | 기록 | 계산해 보면 |
|---|---|---|
| 호수 물의 양 | 1,455만㎥ | 가로 50m·세로 25m·깊이 2m 수영장(2,500㎥) 약 5,820개 |
| 호수가 비는 데 걸린 시간 | 약 65분(모델) | 평균 초당 약 3,730㎥ |
| 골짜기 최대 유량 | 초당 1만 2,000㎥ 이상 | 평균 유출량의 약 3.2배 |
| 댐에서 존스타운까지 | 강 길이 23km, 57분 | 평균 시속 약 24km |
| 시내 도달 속도 | 곳에 따라 시속 64km | 초속 약 17.8m |
| 우드베일 사망자 | 1,100명 중 314명 | 약 28.5% |
| 신원 미확인 희생자 | 2,208명 중 777명 | 약 35.2% |
| 구호 성금 | 374만 2,818.78달러 | 희생자 1명당 약 1,695달러 |
평균 시속 24km와 시속 64km가 함께 나오는 건 모순이 아니에요. 물은 고가교 같은 곳에서 막혔다 터지기를 되풀이했기 때문에, 23km 전체를 평균 내면 느려지지만 막힌 곳이 터진 직후에는 훨씬 빨라졌어요. 초당 1만 2,000㎥라는 최대 유량도 호수 전체가 고르게 빠졌을 때의 평균보다 세 배 넘게 커요. 댐 높이를 0.91m 낮춘 일은 원래 높이 22m의 약 4%에 불과한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2016년 분석은 이 변화와 방류관 미설치가 합쳐져 안전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물의 양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봤어요.
클라라 바턴의 적십자와 미국 법에 남은 흔적
펜실베이니아 철도는 이레 밤낮으로 일해 무너진 고가교 자리에 임시 나무 다리를 놓고 6월 2일 89km 떨어진 피츠버그까지 운행을 되살렸어요. 존스타운이 처음 외부에 요청한 것은 관과 장의사였어요. 철거 전문가 '다이너마이트 빌' 플린과 900명의 작업반이 돌다리 잔해를 치웠고, 구호 인력은 한때 약 7,000명에 이르렀어요. 미국 적십자 설립자 클라라 바턴은 6월 5일 도착해 적십자의 첫 대규모 재난 구호를 이끌었고, 다섯 달 넘게 떠나지 않았어요. 성금은 미국 전역과 러시아, 프랑스, 독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만 제국 등 18개국에서 모였어요.
집 1,600채가 무너졌고, 피해액은 1,700만 달러(2024년 가치로 약 5억 3,600만 달러)로 추산돼요. 존스타운 시내 10㎢가 완전히 파괴됐어요. 캠브리아 제철소는 크게 부서졌지만 18개월 만에 생산을 완전히 되찾았어요. 법정에서 생존자들이 진 일은 미국 법에도 흔적을 남겼어요. 클럽의 과실을 입증하지 못해 소송이 모두 실패하자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고, 1890년대 여러 주 법원이 그동안 거의 무시되던 영국 판례 '라일랜즈 대 플레처'를 받아들였어요. 과실이 없어도 땅을 부자연스럽게 이용해 피해를 냈다면 책임을 진다는 이 판례는 20세기 미국 법이 무과실 책임(엄격 책임)을 받아들이는 길을 미리 보여 줬어요.
존스타운은 그 뒤에도 1894년, 1907년, 1924년, 1936년, 1977년에 큰 홍수를 겪었어요. 1936년 홍수 뒤 미 육군 공병대가 강바닥을 파고 콘크리트 강벽을 쌓아 깊이 약 6m의 수로를 만들고 '홍수 없는 도시'를 선언했지만, 1977년 7월 19일 밤 여덟 시간 동안 280mm의 비가 쏟아져 78명이 숨졌어요. 그중 40명은 로렐런 댐 붕괴로 목숨을 잃었어요. 1년도 안 돼 일어난 월넛그로브 댐 붕괴와 함께, 1889년 홍수는 미국 전역에 댐 안전 문제를 처음 크게 알린 사건으로 남았어요. 지금 사우스포크 댐 자리와 클럽 건물은 국립공원관리청이 관리하는 기념지가 됐고, 두 강이 만나는 포인트 파크에서는 희생자를 기리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어요.

존스타운 대홍수 자주 묻는 질문
- 존스타운 대홍수 사망자는 몇 명인가요?
- 공식 사망자는 2,208명이에요. 처음엔 2,209명으로 집계됐지만, 숨진 것으로 처리된 리로이 템플이 11년 뒤 살아 돌아와 한 명이 줄었어요.
- 사우스포크 댐은 왜 무너졌나요?
- 기록적인 폭우로 호수 물이 댐을 넘쳤어요. 클럽이 댐을 약 0.91m 낮추고 방류관을 다시 달지 않아 안전하게 내보낼 수 있는 물의 양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2016년 분석이 있어요.
- 존스타운 홍수 때 경고는 없었나요?
- 클럽 쪽에서 이웃 마을 전신국을 통해 두 번 경고 전보를 보내게 했지만 존스타운 당국에 전달되지 않았어요. 이전에 헛경보가 많았던 탓에 급하게 여기지 않았던 거예요.
- 댐 소유주인 클럽은 책임을 졌나요?
- 아니요. 클럽 회원이기도 했던 변호사들이 댐 붕괴를 '신의 행위'라고 주장해 이겼고, 생존자들은 법적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회원 일부가 개인적으로 성금을 냈어요.
참고 자료
- Wikipedia, Johnstown Flood
- 사진: Johnstown Flood - general view of debris cph.3b08649
- 사진: 17552u Broken dam from roadway, Johnstown Flood
- 사진: 17540u Bed of lake looking from top of broken dam, Johnstown flood
- 사진: 17546u Wreck of Pullman cars and engines at Conemaugh, Johnstown Flood, May 31st, 1889
- 사진: Johnstown Main Street 1889 flood
- 사진: Johnstown Tree in House
- 사진: Remmants of house in Johnstown Flood
- 사진: The Great Conemaugh Valley Disaster
- 사진: Johnstown Bridge
- 사진: Remains of the South Fork Dam (11662746524)
- 사진: Southfork Club P62202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