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1월 7일 오전 11시 무렵, 미국 워싱턴주 퓨젓사운드의 좁은 해협 위에서 다리 하나가 통째로 바다에 떨어졌어요. 이름은 타코마 내로스 다리(Tacoma Narrows Bridge). 그해 7월 1일에 개통했으니 차가 다닌 기간은 고작 129일이었어요. 무너질 당시 이 다리는 주경간 기준으로 금문교와 조지 워싱턴 다리 다음가는 세계 세 번째로 긴 현수교였어요.
이 사고가 지금까지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다리가 엿가락처럼 비틀리다 찢어지는 장면이 필름에 고스란히 남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 원인을 두고 수십 년 동안 공학자·물리학자·수학자가 논쟁해 왔다는 점이에요. 많은 물리 교과서가 '공진'의 대표 사례로 소개했지만, 실제 기록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요.
더 싸고 더 날씬하게 바뀐 설계
타코마와 키챕반도를 잇는 다리를 놓자는 이야기는 1889년 철도 회사의 가교 제안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본격적인 추진은 1920년대 중반 타코마 상공회의소가 시작했어요. 재원은 처음부터 문제였어요. 통행료만으로는 공사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해협을 오가던 민간 페리 회사의 계약도 사들여야 했거든요. 그래도 브레머턴의 퓨젓사운드 해군 조선소를 운영하던 해군, 타코마 인근 매코드 비행장과 포트 루이스를 운영하던 육군이 다리를 강하게 원했어요.
워싱턴주 기술자 클라크 엘드리지가 내놓은 처음 설계는 검증된 방식이었어요. 도로 아래에 깊이 25피트(약 7.6m)짜리 트러스를 달아 상판을 단단히 잡는 구조였죠. 그런데 금문교 설계에도 참여한 뉴욕의 이름난 교량 기술자 리언 모이세이프가 더 싸게 지을 수 있다고 연방 기관에 건의했어요. 그는 주 케이블이 옆바람 압력의 절반까지 받아 줄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근거로, 트러스 대신 깊이 8피트(약 2.4m)짜리 판형 거더(plate girder)만 쓰자고 했어요.
모이세이프의 안은 더 날렵하고 우아했으며 무엇보다 저렴했어요. 1938년 6월 23일 연방 공공사업국(PWA)이 약 600만 달러 지원을 승인했고, 공사는 1938년 11월 23일 시작해 19개월 만에 640만 달러로 끝났어요. 다리 폭은 39피트(약 12m)로 왕복 2차로뿐이었어요. 교통량이 많지 않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에요. 흥미롭게도 공사 중이던 1938년 미국토목학회 모임에서, 예전에 이 다리 사업에 관여했던 교량 기술자 데이비드 스타인먼이 설계자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이 다리가 무너질 거라고 예언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갤로핑 거티'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
얕고 좁은 거더는 상판을 충분히 단단하게 잡아 주지 못했어요. 상판이 놓이기 시작하자마자 바람이 불면 다리가 위아래로 출렁였어요. 약하거나 보통 정도의 바람에도 가운데 경간의 절반이 몇 피트씩 올라가고 나머지 절반이 내려가는 움직임이 4~5초 간격으로 눈에 보일 정도였어요. 이걸 몸으로 겪은 공사 노동자들이 붙인 별명이 '갤로핑 거티(Galloping Gertie)', 우리말로 하면 '날뛰는 거티'쯤 돼요.
별명은 금세 퍼졌어요. 개통 첫날부터 통행료를 내고 건너던 시민들도 이 출렁임을 느꼈다고 해요. 운전자들은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파도를 타듯 솟았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봤어요. 다만 당시에는 다리의 무게가 충분해서 구조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여겼어요.

흔들림을 잡으려던 세 가지 시도
관리 당국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어요. 먼저 거더에 묶은 케이블을 육지의 50톤짜리 콘크리트 블록에 고정했지만, 설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블이 끊어졌어요. 다음으로 경간 가운데에서 주 케이블과 상판을 비스듬한 케이블로 연결했는데, 이건 붕괴 때까지 남아 있었지만 흔들림을 줄이지 못했어요. 마지막으로 탑과 상판 사이에 유압 완충기를 달았지만, 도장 전에 다리를 샌드블라스트로 닦는 과정에서 완충기의 밀봉 부품이 망가져 제 역할을 못 했어요.
당국은 워싱턴대학교의 프레더릭 버트 파쿼슨 교수에게 풍동 실험을 맡겼어요. 파쿼슨 팀은 다리 전체를 200분의 1로 줄인 모형과 상판 일부를 20분의 1로 줄인 모형을 만들었고, 1940년 11월 2일 첫 연구를 마쳤어요. 제안은 둘이었어요. 거더와 상판에 구멍을 뚫어 바람이 빠져나가게 하거나, 상판 옆면에 바람막이 같은 유선형 덮개(페어링)를 붙이는 것이었죠. 되돌릴 수 없는 첫 번째 안 대신 두 번째 안이 선택됐지만, 실행할 시간은 없었어요. 연구가 끝나고 닷새 뒤 다리가 무너졌거든요.
1940년 11월 7일 오전, 비틀리기 시작한 상판
그날 오전 9시 45분쯤(태평양 표준시), 유난히 강한 바람에 다리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이번 움직임은 평소의 위아래 출렁임과 달랐어요. 도로 왼쪽이 내려가면 오른쪽이 올라가고, 다시 반대로 넘어가는 비틀림이었어요. 도로 한가운데 선은 거의 그대로인 채 양쪽 절반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꼬였어요. 기록된 풍속은 시속 40마일(약 64km) 안팎으로, 태풍급과는 거리가 먼 바람이었어요.
다리 위에는 적어도 차 두 대가 있었어요. 래피드 트랜스퍼 회사 직원 루비 재콕스와 아서 헤이건이 몰던 배달 트럭은 흔들림에 옆으로 넘어졌고, 지역 신문 『뉴스 트리뷴』의 편집자 레너드 코츠워스가 몰던 승용차는 제어를 잃고 좌우로 미끄러졌어요. 세 사람은 차를 버리고 걸어서 다리를 빠져나왔어요. 코츠워스의 딸이 키우던 다리 셋 달린 코커스패니얼 '터비'만 차 안에 남았어요.
코츠워스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어요. 주변에서 콘크리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개를 데리러 차로 돌아가려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으며, 다리가 무너지고 있으니 살 길은 해안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판단했다고요. 그는 대부분 무릎과 손으로 기어서 500야드(약 457m) 넘게 탑까지 갔고, 무릎은 까져 피가 났으며 콘크리트 연석을 붙잡느라 손이 퉁퉁 부었다고 적었어요. 요금소에 도착한 뒤 그는 다리가 마지막으로 무너지며 자기 차가 해협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봤어요.

더 이상 차가 들어오지 않도록 통행이 막혔어요. 『뉴스 트리뷴』의 사진기자 하워드 클리퍼드가 터비를 구하려고 다리 위로 걸어 들어갔지만, 가운데 경간이 부서지기 시작하자 돌아설 수밖에 없었어요. 오전 11시 무렵 상판은 해협으로 떨어졌어요. 이 사고로 사람은 숨지지 않았고, 희생은 개 터비 한 마리였어요. 다리를 피해 도망치거나 개를 구하려던 사람들이 다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코츠워스는 나중에 주 유료교량청으로부터 차와 차 안 물건값, 터비까지 포함해 814.40달러를 보상받았어요.
필름이 실제보다 빠르게 보이는 이유
붕괴 장면은 타코마의 사진관 '더 카메라 숍'을 운영하던 바니 엘리엇과 하빈 먼로가 카메라 두 대로 찍었어요. 클리퍼드가 터비를 구하려다 실패하는 장면도 담겼죠. 필름은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팔려 흑백 뉴스릴로 복제돼 전 세계 극장에서 상영됐고, 1998년에는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영화등기부에 보존 대상으로 올랐어요. 지금도 공학·건축·물리학 수업에서 경고의 사례로 틀어 줘요.
원본은 16mm 코닥크롬 컬러 필름이었지만 퍼져 있는 사본 대부분은 흑백이에요. 당시 뉴스릴이 35mm 흑백 필름으로 옮겨 찍었기 때문이에요. 촬영 속도도 달랐어요. 먼로는 초당 24프레임, 엘리엇은 초당 16프레임으로 찍었는데, 변환할 때 모두 24프레임으로 찍은 것으로 가정하는 바람에 흔히 보는 영상은 실제보다 약 50% 빠르게 재생돼요. 24를 16으로 나누면 1.5이니 계산이 맞아요. 2019년 2월에는 서쪽 기그하버 방향에서 찍은 새 필름도 공개됐어요. 요금 징수원으로 일하던 토목 기술자 아서 리치가 찍은 것으로, 그는 다리가 불안정해지자 서쪽에서 건너려는 사람을 막다가 마지막으로 서쪽으로 건넌 사람으로 여겨져요.
교과서의 '공진' 설명은 왜 틀렸을까
오랫동안 많은 물리 교과서는 이 사고를 강제 공진의 예로 설명했어요. 그네를 타는 아이 등을 박자에 맞춰 밀면 그네가 점점 크게 흔들리듯, 바람이 다리의 고유 진동수와 같은 박자로 밀어서 무너졌다는 이야기예요. 그 박자의 후보로 꼽힌 것이 카르만 소용돌이였어요. 바람이 뭉툭한 물체를 지나면 뒤쪽에 소용돌이가 번갈아 생기는데, 이 소용돌이의 주기가 다리의 고유 진동수와 맞아떨어졌다는 가설이에요.
기록은 이 가설과 맞지 않아요. 파쿼슨에 따르면 그날 바람은 시속 42마일(약 68km)로 꾸준했고, 다리를 무너뜨린 비틀림 진동은 분당 12회, 즉 0.2Hz였어요. 이는 다리 구조물 자체의 고유 모드도 아니었고, 그 풍속에서 생기는 소용돌이의 주파수(약 1Hz)와도 달랐어요. 1991년 공학자 K. 유수프 빌라와 로버트 스캔런은 이 사고를 '외부에서 강제된 선형 공진'으로 설명하는 교과서들이 틀렸다고 지적했어요. 사고 조사에 참여한 시어도어 폰 카르만의 전기에 '타코마 참사의 범인은 카르만 소용돌이'라고 적힌 것도 오해의 근원으로 꼽았죠. 정작 폰 카르만이 참여한 연방 조사 보고서는 소용돌이와의 공진이 현수교 진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결론 내렸어요.
지금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공탄성 플러터(aeroelastic flutter)'예요. 바람과 구조물의 여러 움직임이 서로 맞물리면서, 흔들림을 줄이는 힘보다 키우는 힘이 더 커지는 상태를 말해요. 감쇠가 음수가 된 셈이라 진동이 스스로 멈추지 않고 계속 커져요. 위키백과가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시속 약 35마일(56km) 이상의 바람이 꾸준히 불면 비틀림 진동의 폭이 끝없이 커질 수 있었어요. 결국 흔들림이 현수 케이블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케이블 몇 가닥이 끊어지자 그 하중이 옆 케이블로 옮겨 가며 줄줄이 끊어져 가운데 상판 거의 전부가 바다로 떨어졌어요. 다만 '공진'이라는 말의 정의가 학자마다 달라서, 빌라와 스캔런도 넓은 의미로는 공진이라 불러도 정의에 어긋나지는 않는다면서, 스스로 들뜨는 계와 보통의 선형 공진은 수학적으로 분명히 다르다고 덧붙였어요.

다리를 흔든 바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그날 해협에 강풍을 몰고 온 저기압은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나흘 뒤 오대호 지역에 '휴전기념일 눈보라(Armistice Day Blizzard)'를 일으켰고, 이 폭풍으로 중서부에서 145명이 숨졌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타코마 내로스 다리
| 항목 | 기록 | 환산·계산 |
|---|---|---|
| 개통 ~ 붕괴 | 1940년 7월 1일 ~ 11월 7일 | 129일(약 4개월) |
| 주경간 길이 | 2,800피트 | 약 853m |
| 다리 폭 | 39피트(2차로) | 약 11.9m, 경간의 약 72분의 1 |
| 보강 거더 깊이 | 8피트(처음 안 25피트 트러스) | 약 2.4m, 처음 안의 약 3분의 1 |
| 붕괴 때 풍속 | 시속 40~42마일 | 약 64~68km/h |
| 비틀림 진동 | 분당 12회 | 0.2Hz, 한 번 꼬이는 데 약 5초 |
| 흔들림 시작 ~ 붕괴 | 오전 9시 45분쯤 ~ 11시쯤 | 약 1시간 15분 |
| 공사비·공기 | 640만 달러, 19개월 | 1938년 11월 착공 |
| 잔해 위치 | 수심 180피트 | 약 55m |
표의 환산값은 1피트 = 0.3048m, 1마일 = 1.609km로 직접 계산했어요. 2,800피트에 0.3048을 곱하면 853.4m이고, 39피트는 11.9m예요. 경간을 폭으로 나누면 2,800 ÷ 39 ≈ 71.8이니 길이가 폭의 70배가 넘는 띠 같은 다리였던 셈이에요. 거더 깊이 8피트를 처음 안의 트러스 25피트와 비교하면 0.32, 대략 3분의 1이에요. 진동 주파수 0.2Hz는 1초에 0.2번, 곧 5초에 한 번 꼬였다는 뜻이고, 소용돌이 주파수로 추정된 약 1Hz보다 다섯 배 느렸어요. 이 차이가 '소용돌이 공진' 설명이 맞지 않는 핵심 근거예요.
보험금 횡령부터 인공 어초까지, 붕괴 이후
조사 과정에서 엉뚱한 사실도 드러났어요. 머천츠 화재보험 회사를 대리하던 보험 대리인 핼릿 R. 프렌치가 80만 달러 규모 보험의 보험료를 회사에 넘기지 않고 챙긴 탓에, 워싱턴주는 그 보험금을 받지 못했어요. 그는 중절도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어요. 나머지 여러 보험이 520만 달러짜리 구조물 가치의 80%를 보장했고, 대부분은 문제없이 지급됐어요.
연방사업청 위원회(오트마 암만, 시어도어 폰 카르만, 글렌 B. 우드러프)는 확정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자기 유발 진동에 의한 공기역학적 불안정, 주기적인 소용돌이, 난류의 무작위 효과라는 세 가지 가능성을 검토했어요. 연방과 주가 각각 꾸린 검토단은 다리를 고칠 수 없으니 상부 구조를 새로 지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어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강철이 귀해지면서 케이블과 상판의 강철은 고철로 팔렸지만, 철거 비용이 판매 대금보다 커서 주는 35만 달러 넘게 손해를 봤어요. 붕괴 때 해안 쪽으로 12피트(약 3.7m) 휘어진 탑도 해체됐어요.

바다로 떨어진 상판은 지금 커다란 인공 어초가 됐고, 미국 국가사적지(등록번호 92001068)에 올라 있어요. 전쟁으로 자재와 인력이 모자라 새 다리는 10년 가까이 지난 1950년 10월 14일에야 같은 자리에 개통했어요. 옛 다리의 탑 기초와 케이블 앵커를 그대로 다시 썼고, 상판 아래에는 다시 깊고 무거운 트러스를 달았어요. 이 다리가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2007년 7월 바로 옆에 동쪽 방향 전용 현수교가 하나 더 생겼어요.
모든 장대교가 풍동을 거치게 된 계기
이 사고 뒤로 교량 공기역학 연구가 크게 늘었고, 이후 지어진 모든 장대 교량의 설계에 영향을 줬어요. 설계 단계의 풍동 실험은 결국 의무가 됐어요. 비슷한 구조였던 뉴욕의 브롱크스-화이트스톤 다리는 1943년 상판 양옆에 높이 14피트(약 4.3m)의 강철 트러스를 달아 무게와 강성을 보탰고, 2003년에는 이 트러스를 떼어 내고 유리섬유 유선형 덮개를 붙였어요. 현수교는 한동안 깊고 무거운 트러스 구조로 돌아갔다가, 1960년대 영국 세번 다리처럼 날개 단면을 닮은 상자형 거더가 나오면서 날씬함과 강성을 함께 얻게 됐어요.
조사 위원이었던 오트마 암만은 교량 공학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정밀한 과학이 아니며, 경험해 보지 못한 규모로 나아가는 구조물은 이론도 경험도 충분한 길잡이가 되지 못한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어요. (요지)
타코마 내로스 다리는 계산이 틀려서라기보다, 계산에 넣지 않은 힘 때문에 무너졌어요. 정적인 옆바람은 꼼꼼히 따졌지만 바람과 상판이 주고받으며 커지는 움직임은 당시 설계 이론 바깥에 있었어요. 129일 동안 출렁이던 다리가 남긴 필름은 그래서 지금도 강의실에서 다시 돌아가요.
타코마 다리 붕괴 자주 묻는 질문
- 타코마 다리 붕괴로 사람이 죽었나요?
- 사람은 숨지지 않았어요. 차 안에 남겨졌던 다리 셋 달린 코커스패니얼 '터비'가 희생됐고, 다리를 빠져나오거나 개를 구하려던 사람들이 다쳤어요.
- 타코마 다리는 공진 때문에 무너졌나요?
- 교과서에서 흔히 공진으로 설명했지만, 붕괴 진동(0.2Hz)은 소용돌이 주파수(약 1Hz)와도 다리의 고유 모드와도 맞지 않았어요. 지금은 바람과 구조가 맞물려 진동이 스스로 커지는 공탄성 플러터로 설명해요.
- 타코마 다리 붕괴 영상은 왜 빨라 보이나요?
- 엘리엇은 초당 16프레임으로 찍었는데 변환할 때 24프레임으로 가정해서, 흔히 보는 영상은 실제보다 약 50% 빠르게 재생돼요.
- 갤로핑 거티는 무슨 뜻인가요?
- 바람만 불면 상판이 위아래로 출렁이는 모습을 보고 공사 노동자들이 붙인 별명이에요. '날뛰는 거티' 정도의 뜻이에요.
참고 자료
- Wikipedia, Tacoma Narrows Bridge (1940)
- Wikipedia, 1940 Armistice Day Blizzard
- 사진: Tacoma Narrows still
- 사진: Opening day of the Tacoma Narrows Bridge, Tacoma, Washington
- 사진: Tacoma Narrows Bridge, looking west across toll plaza, 29 August 1940 (HAER WASH,27-TACO,11-31)
- 사진: Vertical and torsional oscillations, 7 November 1940 (HAER WASH,27-TACO,11-34)
- 사진: Storm system weather analysis, November 7, 1940
- 사진: Galloping Gertie fragment 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