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계산기
← 블로그로 돌아가기

사건사고이야기

빵집 화덕에서 시작돼 집 1만 3천 채를 태웠다: 1666년 런던 대화재의 나흘과 기록된 사망자 수의 진실

1666년 9월 2일 새벽 런던 푸딩 레인의 빵집에서 난 불이 나흘 동안 집 1만 3천여 채와 세인트폴 대성당을 태웠어요. 시장의 망설임, 화약으로 만든 방화대, 억울하게 처형된 시계공, 벽돌 도시와 화재보험의 탄생까지 기록으로 정리했어요.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런던 다리와 강변 건물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길을 템스강 배 위에서 바라본 그림
타워 부두 근처 배 위에서 바라본 런던 대화재. 옛 런던 다리와 옛 세인트폴 대성당 등이 그려져 있어요. 네덜란드 화풍의 작품으로 서명과 날짜는 없어요. · 작자 미상(1675년경)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1666년 9월 2일 일요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런던 푸딩 레인에 있던 토머스 패리너의 빵집에서 불이 났어요. 식구들은 위층 창문으로 옆집에 건너가 목숨을 건졌지만, 겁에 질려 창문을 넘지 못한 하녀가 이 화재의 첫 희생자가 됐어요. 이웃들이 한 시간 동안 불을 끄려 애썼고, 교구 순경들은 옆집을 헐어 불길을 끊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 판단이 바로 실행됐다면 이 불은 그날 밤 이웃 몇 집을 태우고 끝났을지도 몰라요. 실제로는 9월 5일 수요일까지 나흘 동안 로마 시대 성벽 안쪽의 옛 런던 시내 대부분과 성벽 서쪽 일부가 잿더미가 됐어요. 집 1만 3천여 채, 교구 교회 80여 곳, 그리고 세인트폴 대성당이 사라졌어요. 런던이라는 도시의 모양과 건축 규칙, 보험 산업까지 바꿔 놓은 이 화재를 기록에 남은 순서대로 따라가 볼게요.

나무 집이 빽빽했던 1660년대 런던

1660년대 런던은 영국에서 압도적으로 큰 도시였고, 인구 30만~40만 명으로 서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추정돼요. 1659년 작가 존 이블린은 화려한 파리와 견주며 런던을 '나무로 지은, 북쪽의, 계획 없이 들어찬 집 덩어리'라고 불렀어요. 그중 성벽과 템스강으로 둘러싸인 '시티'는 약 700에이커(2.8㎢) 넓이에 8만 명쯤이 살던 상업 중심지였어요. 1665년에는 흑사병까지 휩쓸어 시내는 붐비고 지저분했어요.

건물은 불에 약했어요. 나무로 짓거나 초가지붕을 얹는 일은 수백 년 전부터 금지됐지만 값싼 재료라 계속 쓰였어요. 여러 층짜리 목조 셋집은 위층으로 갈수록 길 쪽으로 튀어나오게 지어서, 좁은 골목에서는 꼭대기 층끼리 거의 맞닿았어요. 찰스 2세는 1661년과 1665년 두 차례 이런 건축을 금지하는 포고를 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았어요. 강변 창고에는 타르, 피치, 삼, 송진, 아마가 쌓여 있었고, 런던탑에는 화약이 500~600톤 보관돼 있었어요.

불타는 집에 사다리를 걸고 양동이를 나르며 긴 갈고리로 지붕을 끌어내리는 사람들을 그린 목판화
1612년 목판화에 그려진 17세기 소방 모습. 사다리와 양동이, 집을 끌어내리는 긴 '파이어훅'이 보여요. ·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당시 소방은 물과 철거가 전부였어요. 법에 따라 교구 교회마다 긴 사다리, 가죽 양동이, 도끼, 집을 끌어내리는 갈고리를 갖춰야 했어요. 불길이 번질 방향의 집을 미리 헐어 빈 땅(방화대)을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때로는 화약으로 건물을 무너뜨렸어요. 소방 펌프도 있었지만 바퀴 없는 썰매형이 많았고 호스도 없어 쓸모가 적었어요. 이번에는 펌프 여러 대가 물을 채우려다 템스강에 빠졌어요.

일요일: 시장의 망설임과 피프스의 보고

집주인들이 철거에 반대하자 런던 시장 토머스 블러드워스가 불려 왔어요. 그가 도착했을 때 불은 이미 옆집들을 태우며 강변 창고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어요. 경험 많은 소방꾼들은 철거를 외쳤지만, 블러드워스는 대부분 셋집이라 집주인을 찾을 수 없다며 거부했어요. 그러고는 '여자 하나가 오줌만 눠도 끄겠다'는, 지금까지 자주 인용되는 말을 남기고 떠났어요. 다만 역사가 제이컵 필드는 당시 소방 기술과 철거를 둘러싼 사회적 부담을 생각하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봐요.

긴 갈색 가발을 쓰고 갈색 옷을 입은 채 악보를 든 새뮤얼 피프스의 초상화
존 헤일스가 1666년에 그린 새뮤얼 피프스. 그의 일기는 대화재를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이에요. · John Hayls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그날 아침 해군 관리 새뮤얼 피프스는 런던탑 성벽에 올라 불을 지켜봤어요. 그는 동풍이 불을 큰불로 키웠고, 강변까지 가는 길에 집 300채쯤이 탔으며 런던 다리 위 집들도 불타고 있다고 일기에 적었어요. 배를 타고 가까이 가 본 그는 사람들이 짐을 강에 던지거나 거룻배에 싣고, 가난한 이들은 불이 닿을 때까지 집에 있다가 배로 뛰어드는 모습을 기록했어요. 화이트홀 궁전으로 간 피프스는 국왕 찰스 2세와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에게 집을 헐지 않으면 불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했어요.

왕은 피프스를 시켜 시장에게 집을 아끼지 말고 헐라는 명령을 전했어요. 피프스가 찾은 블러드워스는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헐어도 불이 우리보다 빨리 따라온다'고 하소연했고, 제임스가 보낸 병력도 거절한 뒤 집에 가서 잤어요. 결국 왕이 직접 배를 타고 내려와 시장의 권한을 넘어 불 서쪽 집들을 대대적으로 헐라고 명령했어요. 일요일 오후 불은 스스로 바람을 만드는 화염 폭풍이 됐고, 저녁까지 강을 따라 서쪽으로 500m를 번졌어요.

월요일: 금화를 꺼내 달아난 은행가들과 외국인 습격

월요일 불은 서쪽과 북쪽으로 퍼졌어요. 남쪽은 강이 막았고, 런던 다리 위 건물 사이 빈터가 방화대 역할을 해서 강 건너 서더크는 살아남았어요. 오후에는 롬바드 거리의 은행가들 집에 불이 붙어 금화가 녹기 전에 꺼내려는 소동이 벌어졌어요. 상업 거래소인 왕립 거래소도 늦은 오후 불이 붙어 몇 시간 만에 뼈대만 남았어요. 이블린은 사람들이 너무 놀라 불을 끌 생각도, 짐을 건질 생각도 못 하고 넋 나간 듯 뛰어다니며 울부짖기만 했다고 적었어요.

런던 시내 지도 위에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날짜별로 불이 번진 범위를 색으로 구분해 표시한 지도
날짜별로 본 런던 대화재의 확산 범위. 역사가 틴니스우드(2003)와 홀라(1666)의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그린 지도예요. · Bunchofgrapes, Tom Fish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바람에 날린 불티가 멀리 떨어진 초가지붕에 내려앉아 엉뚱한 곳에서 새 불이 나자,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지른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영국은 당시 네덜란드와 전쟁 중이었고, 의심은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에게 쏠렸어요. 외국 첩자가 '불덩이'를 던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거리 폭력이 잇따랐어요. 전국 우편이 거쳐 가던 우체국은 월요일 아침 불탔고, 런던 가제트는 인쇄소가 타기 직전에 겨우 월요일 호를 냈어요. 민병대와 근위대는 불을 끄기보다 외국인을 붙잡거나 폭도에게서 구해 내는 데 매달렸어요.

짐을 옮기려는 사람이 몰리자 수레 값이 치솟았어요. 화재 전 주에 몇 실링이던 수레 대여료가 월요일에는 최대 40파운드까지 올랐는데, 2021년 가치로 약 13만 3,000파운드에 해당하는 큰돈이에요. 수레들이 좁은 성문에 몰려 혼란이 극에 달하자 치안판사들은 사람들이 짐 대신 불 끄기에 나서도록 잠시 성문을 닫기도 했어요. 시장 블러드워스의 이름은 월요일 기록에 아예 나오지 않아요. 왕은 제임스에게 지휘를 맡겼고, 제임스는 불길 둘레에 지휘소를 차리고 밤낮없이 거리를 누볐어요.

화요일: 세인트폴 대성당이 무너진 날

9월 4일 화요일은 피해가 가장 컸던 날이에요. 제임스는 플리트강을 천연 방화대로 삼아 서쪽 화이트홀 궁전으로 가는 불을 막으려 했지만, 이른 아침 거센 동풍에 불길이 강을 뛰어넘어 소방대가 달아나야 했어요. 오전에는 부유한 상점가 칩사이드가 불탔어요. 낮 동안 불은 바람을 거슬러 동쪽 런던탑 쪽으로도 번졌는데, 화약 창고가 있던 런던탑 수비대는 지원을 기다리다 못해 주변 집들을 대규모로 폭파해 방화대를 만들었고 불길을 멈췄어요.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러드게이트 성문과 피난민들, 뒤쪽 멀리 보이는 옛 세인트폴 대성당을 그린 그림
불타는 러드게이트와 옛 세인트폴 대성당을 그린 1670년경 작품. 러드게이트는 이 화재로 사라진 서쪽 성문 세 곳 중 하나예요. · 작자 미상(1670년경)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두꺼운 돌벽과 넓은 빈 광장이 있는 세인트폴 대성당은 안전한 피난처로 여겨졌어요. 성당 안은 사람들이 옮겨 온 짐으로 가득했고, 지하 납골당에는 이웃 패터노스터 로의 인쇄업자와 서적상이 맡긴 책이 빼곡했어요. 그런데 성당은 크리스토퍼 렌의 지휘로 보수 공사 중이어서 나무 비계로 덮여 있었어요. 화요일 밤 이 비계에 불이 붙었고, 30분 만에 납 지붕이 녹아내리고 지하의 책과 종이가 타기 시작했어요. 성당은 순식간에 폐허가 됐어요.

수요일: 바람이 멎고 화약 방화대가 불을 막다

화요일 저녁 바람이 잦아들었고, 수요일인 9월 5일 수비대가 만든 방화대가 효과를 내기 시작했어요. 현대 역사가들은 바람이 멎은 것과 화약으로 만든 방화대, 이 두 가지가 불을 이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봐요. 피프스는 바킹 교회 첨탑에 올라 폐허가 된 시내를 보고 '내가 본 가장 슬픈 황폐함'이라고 적었어요. 작은 불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지하실 석탄은 두 달 뒤에도 타고 있었어요.

시내 북쪽 무어필즈 공원에는 집 잃은 사람들이 천막과 판잣집을 짓고 모여들었어요. 이블린은 이부자리도 그릇도 없이 극도의 가난에 빠진 이들을 보고 경악했어요. 식량 공급이 끊기자 찰스 2세는 날마다 빵을 들여오고 시내 둘레에 시장을 열겠다고 발표했어요. 수요일 밤에는 플리트 거리 위 하늘이 밝아진 것을 보고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 5만 명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 피난민들이 다시 외국인을 습격했어요. 그 빛은 이너 템플 동쪽에서 다시 번진 불이었어요.

사망자 6명인가 수천 명인가, 엇갈리는 피해 기록

공식 기록에 남은 사망자는 몇 명뿐이에요. 역사가 로이 포터는 8명, 에이드리언 틴니스우드는 '한 자릿수'로 보면서도 기록되지 않은 죽음과 피난민 캠프에서 숨진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덧붙여요. 필드는 전통적으로 알려진 6명보다는 많았겠지만 수백 명에 이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봐요. 런던 가제트가 사망자를 단 한 명도 기록하지 않았고, 희생이 컸다면 자선 청원서 등에 드러났을 거라는 이유예요.

반대로 작가 닐 핸슨은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이 죽었다고 주장해요. 이어진 추운 겨울 판잣집과 폐허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숨진 사람들이 있었고, 극작가 제임스 셜리 부부도 그렇게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핸슨은 공식 통계가 기록 없는 빈민의 운명을 거의 말해 주지 않고, 화염 폭풍 한가운데 열은 시신을 거의 남기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고 지적해요. 사망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은 셈이에요.

불타는 런던 시가지 목판화와 그 아래 빽빽한 시구가 인쇄된 1666년 전단
1666년 J. 클라크가 펴낸 전단 '런던 사람들의 탄식(The Londoners Lamentation)'. 화재 뒤 1년 동안 대화재를 다룬 시가 적어도 23편 출판됐어요. · Printed for J. Clark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건물 피해는 비교적 분명해요. 집 1만 3,200~1만 3,500채, 교구 교회 86~87곳, 동업조합 회관 44곳, 왕립 거래소, 세관, 세인트폴 대성당, 브라이드웰 궁전과 감옥들, 우체국, 서쪽 성문 세 곳(러드게이트·뉴게이트·올더스게이트)이 사라졌어요. 손실액은 900만~1,000만 파운드로 추정되며, 불탄 책값만 15만 파운드였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블린은 이즐링턴과 하이게이트 쪽 들판에 '20만 명'이 남은 짐 더미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봤다고 적었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런던 대화재

항목기록계산·환산
화재 기간1666년 9월 2일 일요일 ~ 9월 5일 수요일나흘(첫날 포함 4일)
시티 면적약 700에이커약 2.83㎢
불탄 집1만 3,200~1만 3,500채 = 도시 주택의 약 15%전체 주택 약 8만 8,000~9만 채
일요일 저녁까지 번진 거리강을 따라 서쪽으로 500m약 1,600피트
수레 대여료몇 실링 → 최대 40파운드40파운드 = 800실링, 2실링이었다면 400배
손실액과 책 피해900만~1,000만 파운드 중 책 15만 파운드약 1.5~1.7%
다시 지은 집1만 3,000여 채가 탄 자리에 약 9,000채약 69% 수준
대화재 기념탑 높이61.5m약 202피트

표의 계산은 기록 숫자로 직접 했어요. 1에이커는 약 4,046.86㎡라서 700에이커는 약 283만㎡, 곧 2.83㎢예요. 불탄 집 1만 3,200채가 전체의 15%라면 런던 전체 주택은 13,200÷0.15=8만 8,000채, 1만 3,500채로 계산하면 9만 채가 돼요. 옛 영국 화폐에서 1파운드는 20실링이라 40파운드는 800실링이고, '몇 실링'을 2실링으로 잡으면 400배 오른 셈이에요. 다시 지은 집 9,000채를 1만 3,000채로 나누면 약 0.69예요.

억울한 자백과 기념탑에 새겨진 비난

런던 가제트의 공식 발표는 화재가 사고였다고 결론 내렸지만, 사람들은 외국인과 가톨릭교도를 탓하고 싶어 했어요. 그 결과가 프랑스인 시계공 로버트 위베르의 처형이에요. 그는 처음에 웨스트민스터에서 불을 지른 일당이라고 자백했다가 나중에 푸딩 레인 빵집에 불을 질렀다고 말을 바꿨어요. 재판을 받을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있었는데도 유죄 판결을 받고 1666년 10월 29일 타이번에서 교수형을 당했어요. 그가 죽은 뒤에야 화재가 시작될 때 북해의 배 위에 있었고 불이 난 지 이틀 뒤에야 런던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1666년 9월 3일부터 10일까지를 다룬 런던 가제트 1면, 빽빽한 옛 영어 활자로 화재 소식을 전하는 지면
대화재 소식을 전한 1666년 9월 3~10일 자 런던 가제트 1면(재인쇄본). 공식 기사는 화재를 사고로 보고, 신의 뜻과 국왕의 진화 노력을 강조했어요. · London Gazette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찰스 2세의 제안으로 1671년부터 1676년까지 푸딩 레인 근처에 렌과 로버트 훅이 설계한 높이 61.5m의 기념탑이 세워졌어요. 1681년에는 화재를 가톨릭교도 탓으로 돌리는 문구가 비문에 덧붙여졌어요. 이 문구는 1829년 가톨릭 해방법이 통과된 뒤 런던시 법무관 찰스 피어슨의 운동으로 1830년에야 지워졌어요. 불이 멈춘 곳으로 전해지는 스미스필드의 파이 코너에는 '골든 보이' 조각상이 서 있어요.

현대 건물 사이 좁은 거리 끝에 솟은 꼭대기에 금빛 장식이 달린 돌기둥 기념탑
2011년 8월에 찍은 런던 대화재 기념탑(The Monument). 높이 61.5m 기둥 꼭대기에 금빛 장식이 달려 있어요. · Ainars Brūvelis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렌의 계획 대신 벽돌 도시와 화재보험이 남았다

화재 직후 렌과 이블린, 훅 등이 바둑판 도로에 광장을 둔 새 도시 계획을 내놨고, 찰스 2세도 이를 반겼어요. 그러나 땅 주인마다 소유권을 다시 정하고 보상해야 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당장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은 집터를 측량하라는 권고를 따르지 않았고, 일손도 모자랐어요. 결국 런던은 중세 길 구조를 거의 그대로 살려 다시 지어졌고, 그 길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템스강 북쪽 런던 시내에 넓은 대로와 방사형 광장을 배치한 크리스토퍼 렌의 재건 계획 지도
크리스토퍼 렌의 런던 재건 계획을 담은 1744년 지도. 넓은 대로가 광장에서 뻗어 나가는 구조지만 실제로는 실행되지 않았어요. · Christopher Wren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템스강을 따라 반듯한 격자 도로와 여러 광장을 배치한 존 이블린의 런던 재건 계획도
존 이블린이 내놓은 1666년 런던 재건 계획. 렌과 마찬가지로 격자형 도로를 바탕으로 했어요. ·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대신 규칙이 바뀌었어요. 1666년 재건법은 건물 바깥에 나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벽돌과 돌로 짓게 했으며, 건축 자재 값과 일꾼 임금을 통제하고 3년의 재건 기한을 두었어요. 길은 넓어졌고, 템스강 변 부두는 집이 강을 가로막지 않도록 열렸어요. 재건 비용은 석탄에 매긴 세금으로 충당했어요. 1667년 2월부터 문을 연 화재 법원은 세입자와 집주인 가운데 누가 다시 지을지를 대개 하루 만에 판결해 소송 지연을 막았어요. 개인 주택 재건은 1671년까지 대부분 끝났고, 렌은 세인트폴 대성당과 새 교회 51곳을 지었어요.

이 화재는 화재보험도 낳았어요. 경제학자 니컬러스 바번이 세운 '파이어 오피스'를 시작으로 보험사들이 생겼고, 이들은 사설 소방대를 두고 목조보다 벽돌 건물에 싼 보험료를 매겼어요. 교구 소방과 보험사 소방이 뒤섞여 혼란이 생기자 1832년 보험사들이 연합 소방대를 만들었고, 이 조직이 훗날 런던 소방대가 됐어요. 반면 '대화재가 흑사병을 끝냈다'는 말은 런던 박물관이 대표적인 속설로 꼽는 주장이에요. 1665년 흑사병은 런던 인구의 6분의 1인 약 8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지만, 화재가 재유행을 막았다는 근거는 논란이 있어요.

긴 검은 곱슬머리에 붉은색과 보라색 예복을 입고 손에 보주를 든 채 앉아 있는 국왕 찰스 2세의 초상화
존 마이클 라이트 또는 그의 화실이 1660~1665년 무렵 그린 찰스 2세. 대화재 때 직접 철거를 명령하고 재건을 이끌었어요. · John Michael Wright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런던 대화재는 좁은 골목, 나무 건물, 강한 바람, 늦은 대응이 겹쳐 커졌어요. 지금도 집이나 가게에서 불이 나면 직접 끄려고 오래 머무르지 말고 먼저 대피한 뒤 119에 신고하세요. 기름에 붙은 불에는 절대 물을 붓지 마세요.

런던 대화재 자주 묻는 질문

런던 대화재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나요?
1666년 9월 2일 자정을 조금 넘겨 푸딩 레인에 있던 토머스 패리너의 빵집에서 시작됐어요. 철거로 불길을 끊는 결정이 늦어지는 사이 강한 동풍을 타고 시내로 번졌어요.
런던 대화재 사망자는 몇 명인가요?
공식 기록에 남은 사망자는 6~8명 정도로 아주 적어요.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빈민과 피난민 캠프의 사망자를 고려하면 더 많았을 거라는 주장이 있고, 수천 명이라는 견해까지 있어 확정되지 않았어요.
런던 대화재는 며칠 동안 탔나요?
9월 2일 일요일부터 9월 5일 수요일까지 나흘 동안 번졌어요. 큰불은 수요일에 잡혔지만 지하실의 석탄은 두 달 뒤에도 타고 있었어요.
런던 대화재 방화범으로 처형된 사람이 있나요?
프랑스인 시계공 로버트 위베르가 불을 질렀다고 자백해 1666년 10월 29일 교수형을 당했어요. 하지만 그는 화재가 시작될 때 북해의 배 위에 있었고 이틀 뒤에야 런던에 도착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