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0월 8일 일요일 저녁 8시 30분 무렵, 시카고 도심 남서쪽 디코븐가 137번지 뒤 골목에 붙은 작은 헛간에서 불이 났어요. 오리어리 가족의 헛간이었어요. 이틀 뒤 불이 꺼졌을 때 시카고 한가운데 길이 약 6km, 폭 평균 1km의 땅이 잿더미가 돼 있었어요. 약 300명이 숨졌고, 집을 잃은 사람은 9만~10만 명이 넘었어요.
이 불에는 유명한 범인이 하나 있어요. 오리어리 부인이 젖을 짜던 소가 등불을 걷어찼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처음 신문에 퍼뜨린 기자는 22년 뒤 그것이 지어낸 것이라고 털어놓았어요. 시 당국은 끝내 불의 원인을 밝히지 못했어요. 대신 기록은 작은 헛간 불이 왜 도시 전체를 삼켰는지는 꽤 분명하게 보여 줘요.
석 달 동안 비가 25mm, 나무로 지은 도시
1871년 시카고는 빠르게 커 가던 도시였고 인구는 약 32만 4,000명이었어요. 건물의 3분의 2 넘게가 전부 나무로 지어졌어요. 기둥과 들보 대신 가는 각목을 촘촘히 세우는 '벌룬 프레임' 방식이 널리 쓰였고, 지붕은 대부분 불이 잘 붙는 타르나 나무 판자였어요. 도시의 보도는 모두 나무였고 도로도 상당수가 나무로 깔려 있었어요.
날씨도 나빴어요. 그해 7월 4일부터 10월 9일까지 시카고에 내린 비는 1인치, 곧 25mm뿐이었어요. 오랜 가뭄 끝에 덥고 건조한 날이 이어졌고, 불이 난 날에는 남서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어요. 이 바람이 불씨를 도심 쪽으로 실어 날랐어요.

도시를 지킬 소방력은 넉넉하지 않았어요. 1871년 시카고 소방국에는 소방관 185명과 말이 끄는 증기 펌프차 17대가 전부였어요. 게다가 소방관들은 불이 나기 전 일주일 동안 작은 불 여러 건과 큰불 한 건을 끄느라 이미 지쳐 있었어요.
엉뚱한 곳으로 간 소방대와 두 번 강을 건넌 불
소방국의 첫 대응은 늦지 않았어요. 문제는 방향이었어요. 법원 건물에서 불을 지켜보던 감시원 마티아스 섀퍼가 실수를 해서 소방대가 처음에 엉뚱한 곳으로 출동했어요. 불이 난 동네 근처에서 보낸 화재 경보도 감시원이 있던 법원에 제대로 닿지 않았어요. 그사이 헛간 불은 이웃 건물로 번졌고, 소방대가 디코븐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심 상업 지구를 향해 가고 있었어요.

소방관들은 시카고강 남쪽 지류와 예전에 한 번 불타 없어진 구역이 자연 방화선이 돼 줄 거라고 기대했어요. 하지만 강가에는 목재 야적장과 창고, 석탄 야적장, 바지선이 늘어서 있었고 강을 건너는 다리도 많았어요. 불이 커질수록 남서풍도 세졌고, 건물들은 열기와 바람에 날아온 불붙은 잔해 때문에 연달아 불이 붙었어요. 자정 무렵 불붙은 잔해가 강을 넘어 지붕들과 남부 가스 공장에 떨어졌어요.
불이 강을 건너 도심으로 향하자 도시는 공황에 빠졌어요. 로즈웰 B. 메이슨 시장은 이웃 도시들에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보냈고, 법원에 불이 붙자 건물을 비우고 지하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풀어 주라고 했어요. 9일 새벽 2시 30분 법원의 둥근 지붕이 무너지며 큰 종이 떨어졌는데, 1.6km 떨어진 곳에서도 그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이 있어요.
불을 더 멀리 퍼뜨린 것은 '화염 회오리'로 보여요. 뜨거운 공기가 솟다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 돌기 시작하면 회오리바람 같은 현상이 생기는데, 이것이 불붙은 잔해를 높이, 멀리 날려 보냈을 가능성이 커요. 그렇게 날아간 잔해가 이번에는 시카고강 본류를 넘어 등유를 실은 철도 차량에 떨어졌어요. 불이 두 번째로 강을 건너 북쪽 지역까지 번진 거예요.

수도국이 불타자 도시는 손쓸 수 없게 됐어요
불이 강을 넘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붙은 나무 조각 하나가 시 수도국 지붕에 걸렸어요. 몇 분 만에 건물 안이 불길에 휩싸였고 수도국은 무너졌어요. 시카고 트리뷴의 당시 보도도 수도국 지붕에 이른 시각에 불이 붙어 소방관들이 물러나야 했다고 전해요. 수도관이 말라 버리자 소방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불은 건물에서 건물로, 블록에서 블록으로 아무 저항 없이 번졌어요.
불길 속에서 벌어진 일도 기록에 남아 있어요. 마차꾼과 짐마차꾼 가운데에는 미리 50~100달러를 받지 않으면 짐을 실어 주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돈을 낼 수 없던 아이 딸린 여성들이 그대로 돌아서야 했다고 해요. 혼란을 틈타 일부러 불을 지른 사람도 있었어요. 트리뷴은 웨스트사이드의 예수회 성당에 불을 지른 남자와 번사이드가의 건물에 불을 놓은 여자가 붙잡혔다고 보도했어요.
10월 9일 밤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때 불은 이미 스스로 꺼져 가던 중이었어요. 사람이 빽빽하게 살던 지역을 다 태우고 나서 집이 드문드문한 북쪽 외곽으로 넘어간 뒤였거든요. 잔해가 너무 뜨거워 피해 조사는 며칠이 지나서야 할 수 있었어요.

건물 1만 7천 채와 집 잃은 9만 명, 피해 규모
시가 집계한 불탄 지역은 길이 약 4마일(6km), 평균 폭 4분의 3마일(1km)로 2,000에이커(809헥타르)가 넘었어요. 도로 73마일(117km), 보도 120마일(190km), 가로등 2,000개, 건물 1만 7,500채가 사라졌고, 재산 피해는 2억 2,200만 달러로 1871년 시카고 전체 자산 평가액의 약 3분의 1이었어요. 위키백과 문서 첫머리는 건물 1만 7,000채, 면적 약 3.3제곱마일(9㎢)로 조금 다르게 적고 있어서, 건물 수는 1만 7,000~1만 7,500채로 보면 돼요.
인명 피해는 정확히 셀 수 없었어요. 수습된 시신은 120구였지만 사망자는 300명에 이르렀을 수 있다고 봐요. 카운티 검시관은 일부 희생자가 강에 빠져 숨지거나 유해조차 남지 않을 만큼 타 버렸을 수 있어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집을 잃은 사람은 9만 명으로 인구의 약 28%였어요. 문서 첫머리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적고 있어요.

10월 11일 메이슨 시장은 계엄을 선포하고 미 육군 필립 H. 셰리든 중장에게 도시의 질서를 맡겼어요. 정규군과 민병대, 경찰, 따로 조직한 시민 자원대가 2주 동안 거리를 순찰하고 구호 창고를 지켰고, 10월 24일 임무를 마쳤어요. 시는 바가지요금을 막으려고 12온스(340g)짜리 빵 한 덩이 값을 8센트로 정했고, 화재 뒤 일주일 동안 술집은 밤 9시에 문을 닫게 했어요. 공공건물은 피난처로 열렸어요.
도움은 나라 안팎에서 쏟아졌어요. 뉴욕시는 45만 달러와 옷, 식량을 보냈고 세인트루이스는 30만 달러를 보냈어요. 런던 시의회는 1,000기니를 보냈고 개인 기부로 7,000파운드가 더 모였어요. 인구 4만 명의 스코틀랜드 그리녹에서는 주민 회의 자리에서 바로 518파운드를 모았어요. 시카고와 경쟁하던 신시내티, 클리블랜드, 버펄로도 돈을 보냈고, 밀워키를 비롯한 이웃 도시들은 소방 장비를 보냈어요.
오리어리 부인의 소는 정말 범인이었을까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는 오리어리 부인이 헛간에서 젖을 짜는데 소가 등불을 걷어차 불이 났다는 거예요. 오리어리 가족은 불이 나기 전에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며 부인했지만, 소 이야기는 불길이 잡히기도 전에 도시에 퍼졌고 시카고 트리뷴의 화재 뒤 첫 호에도 실렸어요. 가난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였던 캐서린 오리어리는 당시 미국에 강했던 반아일랜드, 반가톨릭 정서의 손쉬운 표적이었어요.

1893년 기자 마이클 에이헌은 소와 등불 이야기가 지어낸 것이었다고 인정하며 기사를 철회했어요. 그래도 전설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오리어리 가족은 공식적으로 기소된 적이 없었지만, 이야기가 워낙 깊이 뿌리내린 탓에 시카고 시의회는 1997년에 가서야 오리어리 가족과 그 소의 책임이 없다고 공식 결의했어요.
다른 가설도 여럿 있어요. 아마추어 역사가 리처드 베일스는 불을 처음 신고한 대니얼 '페그레그' 설리번이 헛간에서 우유를 훔치려다 건초에 불을 붙였을 수 있다고 봤어요. 1997년 시의회는 이 주장에 설득돼 설리번의 행동을 따져 봐야 한다고 했지만, 학계의 합의는 없고 시카고 공공도서관 측은 그의 해석을 비판했어요. 루이스 M. 콘이라는 사람은 그날 밤 오리어리네 헛간에서 동네 소년들과 주사위 도박을 하다 도망치며 등불을 넘어뜨렸다고 주장한 기록을 남겼지만, 이 역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요.
비엘라 혜성 조각이 떨어져 불이 났다는 가설도 있어요. 같은 날 미시간호 주변에서 큰불 네 건이 났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지만, 운석은 땅에 닿을 때 차가워 불을 내지 않고, 메탄은 공기보다 가벼워 땅 가까이에 모이지 않아요. 비엘라 혜성의 궤도가 지구와 만난 것도 화재 1년 뒤인 1872년이었어요. 과학계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해 여름 중서부 전체가 가물었고, 그날 저녁 들어온 기상 전선의 바람이 곳곳의 작은 불씨를 큰불로 키웠다는 설명이 더 일반적이에요.
같은 날 밤 더 많은 사람이 숨진 페시티고 화재
덥고 건조하고 바람 부는 그날, 미시간호 연안에서는 시카고 말고도 큰불 세 건이 동시에 났어요.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위스콘신주 페시티고에서는 마을과 주변 십여 개 마을이 불타 1,200~2,500명이 숨졌고, 약 150만 에이커(6,100㎢)가 탔어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숨진 화재예요. 하지만 외딴 지역이었고 가장 먼저 탄 것 가운데 하나가 그린베이로 이어지는 전신선이어서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어요.
호수 건너 동쪽에서는 미시간주 홀랜드와 그 주변이 잿더미가 됐고, 홀랜드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벌목 마을 매니스티도 불탔어요. 휴런호 연안에서는 포트휴런 화재가 미시간의 '엄지' 지역 대부분을 휩쓸었어요. 그리고 시카고 재건에 쓸 목재를 대량으로 댄 미시간주 싱가포르라는 마을은 숲이 다 베여 나가 모래 언덕에 묻혔고, 결국 버려졌어요.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시카고와 남은 건물들
재건은 놀랄 만큼 빨랐어요. 마지막으로 불타던 건물이 꺼진 바로 그날 재건용 목재 첫 짐이 도착했어요. 시는 보험업계 경영자들과 아서 C. 듀캣 같은 화재 예방 개혁가들의 압박 속에 곧바로 방화 기준을 새로 썼고, 시카고는 머지않아 미국에서 손꼽히는 소방력을 갖추게 됐어요. 조경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벽이 얇고 겉치레 장식만 무거운 건물들이 문제였다며, 벽돌 벽과 잘 훈련된 소방관, 경찰이 있었다면 피해가 훨씬 적었을 거라고 봤어요.
문을 연 지 13일 만에 불타 버린 파머 하우스 호텔의 개발자 포터 파머는 돈을 빌려 길 건너편에 호텔을 더 높은 기준으로 다시 짓고 '세계 최초의 내화 건물'이라고 홍보했어요. 런던의 A. H. 버제스가 제안한 '영국 도서 기증'으로 8,000권 넘는 책이 모였고, 시의회는 1872년 4월 무료 공공도서관인 시카고 공공도서관 설립 조례를 통과시켰어요. 그때까지 시카고의 도서관은 회비를 내야 하는 사설 도서관뿐이었어요. 화재 22년 뒤인 1893년 세계 콜럼버스 박람회 때 시카고는 2,1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맞았어요.
불탄 구역 안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도 있어요. 시카고 워터 타워와 시카고 애비뉴 펌핑 스테이션, 올드타운의 성 미카엘 성당, 경찰관 벨린저의 오두막 등이에요. 성 미카엘 성당과 펌핑 스테이션은 안이 다 탔지만 바깥벽이 살아남아 그 벽을 그대로 써서 다시 지었어요. 1956년 오리어리네 집터에는 시카고 소방 학교가 들어섰고, 1961년 발화 지점에 에건 와이너의 청동 조각 「불기둥」이 세워졌어요. 1917년 채택된 시카고 시기의 빨간 별 네 개 가운데 하나도 이 대화재를 뜻해요.

숫자로 다시 보는 시카고 대화재
불탄 2,000에이커를 제곱미터로 바꾸면 1에이커가 약 4,047㎡이니 약 809만㎡예요. 우리에게 익숙한 평으로는 1평이 약 3.3058㎡라서 약 245만 평이 돼요. 같은 날 탄 페시티고 일대 6,100㎢는 시카고 불탄 면적 약 8.1㎢의 750배가 넘어요. 숨진 사람 수도 페시티고가 몇 배 많았는데, 세상의 관심은 시카고에 쏠렸어요.
가뭄도 숫자로 보면 실감이 나요. 7월 4일부터 10월 9일까지는 97일이고, 그동안 내린 비 25.4mm를 나누면 하루 평균 0.26mm예요. 소방관 185명이 인구 32만 4,000명을 맡았으니 소방관 한 명이 약 1,750명을 지킨 셈이에요. 집을 잃은 9만 명은 인구의 27.8%로, 시민 네 명 가운데 한 명 넘게 하룻밤 새 집을 잃었어요. 소 이야기를 지어낸 기자가 철회한 1893년부터 시의회 결의가 나온 1997년까지는 104년, 화재로부터는 126년이 걸렸어요.
| 항목 | 기록 | 환산·비교 |
|---|---|---|
| 화재 기간 | 1871.10.8 밤 8시 30분 무렵~10.10 | 이틀 남짓 |
| 불탄 면적 | 2,000에이커 이상(809ha) | 약 809만㎡, 약 245만 평 |
| 불탄 지역 크기 | 길이 약 4마일, 폭 평균 3/4마일 | 약 6km × 1km |
| 사라진 건물 | 1만 7,000~1만 7,500채 | 도로 117km, 보도 190km도 함께 |
| 사망자 | 시신 120구 수습, 최대 약 300명 | 정확한 집계 불가 |
| 집 잃은 사람 | 9만 명(10만 명 이상이라는 기록도 있음) | 인구 32만 4,000명의 약 28% |
| 재산 피해 | 2억 2,200만 달러 | 도시 자산 평가액의 약 3분의 1 |
| 화재 전 강수량 | 7.4~10.9 동안 1인치 | 97일간 25.4mm, 하루 0.26mm |
| 같은 날 페시티고 화재 | 1,200~2,500명 사망, 6,100㎢ | 시카고 불탄 면적의 750배 넘음 |
건조하고 바람이 센 날에는 작은 불씨도 순식간에 번질 수 있어요. 시카고에서도 헛간 한 채의 불이 강풍을 타고 강을 두 번이나 건넜어요. 불이 나면 직접 끄기보다 먼저 119에 정확한 위치를 알리고, 바람이 불어 가는 반대 방향으로 대피하세요.
참고 자료
- Wikipedia, Great Chicago Fire
- Wikipedia, Peshtigo fire
- 사진: Chicago in Flames by Currier & Ives, 1871 (cropped).jpg
- 사진: 1871 Chicago view before the Great Conflagration.jpg
- 사진: 137 DeKoven Street 1871.png
- 사진: Great Chicago Fire map with starting point cropped with arrow.jpg
- 사진: Chicago-fire2.jpeg
- 사진: Attributed to George N. Barnard - Untitled (Chicago after the Chicago Fire) - Google Art Project.jpg
- 사진: Mrs OLeary's cow.jpg
- 사진: Pre fire house in Chicago on Fullerton 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