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4월 16일 수요일 아침, 미국 텍사스주 갤버스턴만의 항구 도시 텍사스시티. 부두에 묶인 프랑스 화물선 그랜드캠프호의 화물칸에서 연기가 올라왔어요. 노란빛이 도는 주황색 연기가 피어오르자 해안가에는 구경꾼이 500명쯤 모였고, 그 가운데에는 아이들도 많았어요. 다들 충분히 떨어져 있다고 믿었어요. 오전 9시 12분, 배에 실린 비료용 질산암모늄 약 2,100톤이 한꺼번에 폭발했어요.
이 폭발과 뒤이은 화재,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옆 배의 두 번째 폭발로 적어도 581명이 숨졌어요. 텍사스시티 자원 소방대원 28명 가운데 27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숨진 산업 사고이자, 핵무기를 빼면 역사상 가장 큰 폭발 가운데 하나로 꼽혀요.
석유화학 공장 옆에서 비료를 싣던 붐 타운의 항구
텍사스시티 항구는 갤버스턴 안쪽의 잔잔한 만에 있으면서 멕시코만으로 곧장 나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2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화학·정유 공장이 몰려들며 크게 컸고, 1946년 한 해에만 배 4,000척쯤이 이 항구에서 짐을 싣고 내렸어요. 폭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주택가는 8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반경 1.6km 안에 대형 화학·정유 회사 여섯 곳, 부두 아홉 개, 창고 열한 동, 곡물 저장고와 많은 집이 있었어요.
항구는 1945년부터 질산암모늄도 실어 보냈어요. 비료로도, 폭약 원료로도 쓰이는 물질이에요. 네브래스카와 아이오와에서 만든 질산암모늄이 철도로 들어왔고, 전쟁이 끝나 탄약 공장이 비료 공장으로 바뀌면서 전쟁으로 무너진 유럽 농가로 보내는 수출량이 크게 늘었어요. 그런데 바로 옆 휴스턴 항은 1946년부터 비료 선적을 금지하고 있었어요. 그랜드캠프호도 휴스턴에서 오는 길이었어요.
리버티선 그랜드캠프호와 배에 실린 2,300톤의 화물
그랜드캠프호는 길이 133m의 리버티선이에요. 194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벤저민 R. 커티스호라는 이름으로 지어져 태평양 전선에서 쓰였고, 전쟁 뒤 필라델피아에 묶여 있다가 프랑스 재건을 돕도록 프랑스 선사에 넘겨졌어요. 선장은 샤를 드 기유봉, 선원도 프랑스인이었어요. 사고 때 배는 엔진을 수리하던 중이라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어요.
배에는 질산암모늄 말고도 노끈, 땅콩, 담배, 소화기용 탄약 약간, 기계류, 면화가 함께 실려 있었어요. 질산암모늄은 습기에 굳지 않도록 점토, 바셀린, 송진, 파라핀을 섞는 특허 공정으로 만들어 45kg짜리 종이 포대에 담았는데, 하역 노동자들은 싣기 전부터 포대가 손에 닿으면 따뜻했다고 전했어요. 4월 11일 들어온 배는 14일부터 짐을 싣기 시작했고, 15일 저녁 비 때문에 멈췄다가 16일 아침 마지막 540톤을 4번 화물칸에 마저 실을 예정이었어요. 4번과 3번 화물칸 사이에는 연료유 탱크가 있었어요.
약 180m 떨어진 곳에는 화물선 하이플라이어호가 있었어요. 이 배에도 질산암모늄 872톤과 황 1,800톤이 실려 있었고, 옆 창고에도 비료가 쌓여 있었어요.
물 대신 증기를 넣은 진화와 노란 연기
오전 8시쯤 4번 화물칸에서 연기가 발견됐어요. 노동자들이 물 한 통과 소화기 두 개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고 칸은 연기로 가득 찼어요. 선장은 화물이 망가질까 봐 물을 쓰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대신 해치를 모두 닫고 화물칸에 증기를 채워 불을 질식시키려 했어요. 하지만 질산암모늄은 스스로 산소를 내놓는 산화제라 증기로 덮어도 불이 꺼지지 않아요. 오히려 증기가 질산암모늄을 아산화질소로 바꾸고 칸 안의 열을 더 키웠을 수 있어요. 8시 30분쯤 열이 너무 세지고 탄약이 터질까 걱정되자 하역 노동자들에게 배에서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항구에는 소화전은 있었지만 자체 소방차가 없었어요. 8시 37분 바깥에 도움을 요청했고, 텍사스시티 자원 소방대와 리퍼블릭 정유 회사의 소방팀이 달려왔어요. 진화 도중 4번 화물칸 해치가 증기 압력에 날아가며 이산화질소의 전형적인 색인 노란빛 주황색 연기가 기둥처럼 솟았어요. 9시쯤 불길이 조금 잦아들었지만 증기는 계속 화물칸을 데우고 있었어요. 선원 대부분은 배에서 내려 있었고, 선장은 부두에서 인원을 세고 있었어요.
오전 9시 12분, 배 한 척이 통째로 사라진 폭발
정확한 기폭 원인은 지금도 몰라요. 가장 유력한 설명은 불의 열 때문에 4번 칸 옆 연료유 탱크가 갈라지면서 뜨겁게 분해되던 비료 위로 기름이 쏟아져, 광산에서 쓰는 폭약인 안포(ANFO)와 비슷한 혼합물이 즉석에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그랜드캠프호는 흔적도 없이 날아갔어요. 반경 610m 안은 완전히 부서졌고, 높이 4.6m의 해일과 충격파가 건물 1,000채 가까이를 무너뜨렸어요. 구경꾼 사망자 상당수는 이 해일 때문이었어요.
배를 이루던 강철 약 5,760톤이 하늘로 솟았고, 일부는 음속보다 빠르게 날았어요. 날아간 파편이 해안가의 정유 시설과 화학 탱크에 불을 붙였고, 불붙은 노끈 뭉치가 비처럼 떨어졌어요. 근처를 날던 관광용 비행기 두 대가 떨어졌고, 13km 떨어진 갤버스턴에서는 유리창의 절반이 깨졌어요. 배가 묶여 있던 선착장 바로 옆 몬샌토 화학 공장이 가장 큰 피해를 입어 직원과 협력업체 인원 574명 가운데 234명이 숨지고 200명이 더 다쳤어요. 배 맞은편에서 소방 호스를 깔던 몬샌토 소방팀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첫 폭발로 텍사스시티 자원 소방대원 28명 가운데 27명이, 텍사스시티하이츠 자원 소방대원 4명 가운데 3명이 숨졌어요. 텍사스시티의 소방차 네 대는 모두 뒤틀리고 불탄 쇳덩이가 됐어요. 그날 출동하지 않았던 소방대원 프레드 다우디가 100km 밖에서까지 달려온 소방대들을 지휘했고, 결국 멀리 로스앤젤레스에서까지 소방관 200명이 왔어요. 그런데도 그랜드캠프호에서 150m 안에 있던 사람 가운데 112명이 살아남았고, 이들의 증언 덕분에 나중에 사고 과정을 되짚을 수 있었어요.
16시간 뒤 새벽 1시 10분, 하이플라이어호의 두 번째 폭발
첫 폭발로 밧줄이 끊긴 하이플라이어호는 항구를 떠돌다 윌슨 B. 킨호 옆에 멈췄어요. 선원들은 한 시간쯤 배에 남아 있었지만 불타는 기름과 황에서 나온 연기 때문에 배를 떠났어요. 오후에 다친 선원을 찾으러 배에 오른 두 사람이 화물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부두의 누군가에게 알렸지만, 이 경고는 몇 시간 동안 묻혔어요.
밤 11시쯤에야 예인선들이 하이플라이어호를 끌어내려 했어요. 닻줄까지 끊었지만 배는 움직이지 않았고, 예인선들은 이튿날 새벽 1시쯤 물러났어요. 그로부터 10분 뒤인 4월 17일 새벽 1시 10분, 하이플라이어호가 폭발했어요. 목격자들은 첫 폭발보다 더 강했다고 했어요. 부두는 이미 비워져 있어 2명이 더 숨지는 데 그쳤지만, 옆의 윌슨 B. 킨호가 부서졌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 덩어리가 시내에 떨어져 곳곳에 큰불이 났어요. 프로펠러 하나는 1.6km 가까이 내륙에서 발견됐어요.

확인된 사망자 405명, 끝내 찾지 못한 113명
숨진 사람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405명, 끝내 확인되지 못한 사람은 63명이에요. 이들은 텍사스시티 북쪽 모지스 호수 근처 추모 묘지에 묻혔어요. 시신의 일부조차 찾지 못해 실종자로 분류된 사람도 113명인데, 폭발 때 그랜드캠프호에 올라 있던 소방대원들도 여기에 들어가요. 오가던 선원과 서류 없는 노동자 가족, 여행자 등 집계에서 빠진 희생자가 수백 명 더 있을 거라는 추측도 있어요. 800명이 넘는 사람이 부모나 배우자를 잃었어요.
다친 사람은 5,000명이 넘었고 그 가운데 1,784명이 인근 병원 21곳에 입원했어요. 집 500채 넘게 무너져 2,000명이 집을 잃었고, 차량 1,100대가 넘게 부서지고 화물차 362량이 사라졌어요. 재산 피해는 당시 돈으로 1억 달러, 불탄 석유 제품은 5억 달러어치로 추산돼요. 불은 일주일 뒤에도 타고 있었고, 시신 수습에는 거의 한 달이 걸렸어요. 바다 건너 갤버스턴은 기름 섞인 안개에 덮여 밖에 드러난 모든 곳에 기름 찌꺼기가 앉았어요.

꽁초, 안전 불감증, 그리고 아무도 맡지 않은 항만 안전
처음 불이 난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어요. 전날 버려진 담배꽁초에서 불이 붙어 밤새 화물이 타들어 갔을 수 있다는 정도예요. 항구에서 흡연은 공식적으로 금지였지만 단속은 없었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흔했어요. 역사학자 휴 스티븐스는 작은 불이 이렇게까지 커진 원인으로 항구의 급팽창, 위험한 항만 작업과 주거지의 가까운 거리, 화학 물질의 위험을 모르는 주민들, 안전 대비 부족을 꼽았어요. 불타는 배를 구경하러 모여든 군중이 그 증거라는 거예요.
질산암모늄의 위험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군 교범은 고성능 폭약으로 분류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물론 미국 농무부 안내에서도 보통 조건에서 비료는 위험하지 않다고 봤어요. 항구에도, 화물 철도 회사에도, 시에도, 정유 회사에도 재난 대비 계획이 없었어요. 바다와 육지를 함께 관리할 항만 당국도 없어서 안전 책임이 회사마다, 육지와 바다로 쪼개져 있었어요. 전쟁이 끝나 군의 감독이 사라진 뒤 해안경비대가 맡아야 했지만 예방 조치를 하지 않았어요. 사고 몇 달 전 지역 가톨릭 신부 윌리엄 로치는 다이너마이트 통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어요. 그는 연기를 보고 도우러 부두로 갔다가 숨졌어요.

정부 상대 첫 집단 소송과 4대 3 대법원 판결
이 참사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첫 집단 소송이 1946년 제정된 연방 불법행위 청구법에 따라 원고 8,485명의 이름으로 제기됐어요. 1950년 4월 13일 지방 법원은 질산암모늄의 제조·포장·표시와 운송·보관·선적·화재 예방과 진화에 걸쳐 168개 기관과 그 대리인의 과실을 인정하고 정부 책임을 물었어요. 하지만 1952년 6월 10일 항소 법원이 이를 뒤집었고, 1953년 6월 8일 연방 대법원도 4대 3으로 정부 손을 들어 줬어요. 정부의 정책적 재량 판단에는 이 법의 책임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였어요.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 셋은 정책이 정당해도 실무자가 그것을 부주의하게 집행했다면 민간인처럼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봤어요.
법원이 거절하자 의회가 나섰어요. 1955년 피해 보상을 위한 법이 통과됐고, 1957년 마지막 청구가 처리될 때까지 1,394건에 모두 1,700만 달러 가까이 지급됐어요. 텍사스시티 구호 기금은 100만 달러 넘게 모였는데, 당시 갤버스턴의 조직범죄를 이끌던 샘 마세오가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불러 연 자선 공연도 큰 몫을 했어요. 피해를 입은 회사들은 며칠 만에 텍사스시티에서 재건하겠다고 발표했고, 일부는 오히려 시설을 키웠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텍사스시티 참사
질산암모늄 2,300쇼트톤은 460만 파운드예요. 이를 100파운드(45kg)짜리 포대로 나누면 4만 6,000포대가 한 배에 실려 있었던 셈이에요. 연기가 처음 보인 오전 8시부터 폭발한 9시 12분까지는 72분, 외부에 도움을 청한 8시 37분부터는 35분이었어요. 첫 폭발부터 하이플라이어호가 터진 새벽 1시 10분까지는 15시간 58분, 거의 16시간이 있었지만 경고는 제때 전달되지 않았어요.
사망자 581명은 신원 확인 405명, 미확인 63명, 실종 113명을 더한 숫자예요. 몬샌토 공장에서는 일하던 사람의 약 41%가 숨졌고, 텍사스시티 자원 소방대는 28명 가운데 1명만 남아 96%를 잃었어요. 의회 보상금 1,700만 달러를 1,394건으로 나누면 한 건에 평균 약 1만 2,000달러예요.
| 항목 | 기록 | 환산·비교 |
|---|---|---|
| 그랜드캠프호 질산암모늄 | 약 2,300쇼트톤 | 약 2,100톤, 45kg 포대 약 4만 6,000개 |
| 하이플라이어호 화물 | 질산암모늄 961쇼트톤, 황 2,000쇼트톤 | 약 872톤, 약 1,800톤 |
| 완전 파괴 반경 | 2,000피트 | 약 610m |
| 폭발 해일 | 15피트 | 약 4.6m |
| 유리창 깨진 갤버스턴 | 8마일 | 약 13km |
| 날아간 2톤 닻 | 1.62마일 | 약 2.61km |
| 두 폭발 사이 | 오전 9시 12분 ~ 새벽 1시 10분 | 15시간 58분 |
| 사망자 | 최소 581명 | 확인 405 + 미확인 63 + 실종 113 |
| 부상자 | 5,000명 이상 | 1,784명 입원 |
화학 공장이나 항구, 창고에서 불이 나거나 노랗거나 주황빛인 이상한 연기가 보이면 구경하러 가까이 가지 말고 바람을 등지고 멀리 대피하세요. 질산암모늄 같은 산화제는 덮어서 공기를 막는 방법으로는 불이 꺼지지 않고, 갑자기 폭발할 수 있어요. 소방 당국의 대피 안내를 따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