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도, 빙산도, 폭발도 없었어요. 1915년 7월 24일 토요일 아침, 미국 시카고 도심을 흐르는 시카고강의 부두에 밧줄로 묶여 있던 유람선 이스트랜드호가 천천히 옆으로 넘어갔어요. 강의 깊이는 6m 남짓이었고 부두까지는 6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승객과 선원 844명이 숨졌어요. 2026년 현재까지도 오대호와 시카고 지역에서 일어난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 간 사고예요.
현장을 지켜본 작가 잭 우드퍼드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어요. 바다를 건너는 여객선만큼 큰 증기선이 마치 고래가 낮잠을 자려고 눕듯 천천히 옆으로 돌아누웠고, 잔잔한 물과 맑은 날씨 속에서 폭발도 불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자기가 미친 줄 알았다고요.
과일 운반용으로 설계된 빠른 배
이스트랜드호는 1902년 10월 미시간 증기선 회사가 주문해 미시간주 포트휴런의 젠크스 조선소에서 지은 오대호 여객선이에요. 원래 이름은 '사우스헤이븐시'가 될 뻔했지만 경쟁 회사가 같은 이름의 배를 지어 이름을 놓쳤고, 공모로 들어온 565개의 이름 가운데 1903년 5월 첫 항해 직전 '이스트랜드'로 정해졌어요. 시카고 동쪽 땅들을 오가려고 만든 배라는 뜻이에요.
문제는 처음부터 있었어요. 첫해 목표 속도인 시속 22마일(35km)에 미치지 못했고, 짐을 싣던 미시간주 사우스헤이븐의 블랙강에 비해 흘수(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가 너무 깊었어요. 1903년 9월 배는 조선소로 돌아가 개조를 받았어요. 냉방 장치와 보일러 출력을 높이는 강제 통풍 장치를 달고, 흘수를 줄이려고 기계 배치를 바꿨어요. 속도는 빨라졌지만 흘수가 얕아지고 높은 곳에 무게가 더해지면서, 배가 기울었다가 다시 서는 힘인 복원성은 처음 설계보다 나빠졌어요.

사고 전부터 여러 번 기울었던 배
이스트랜드호는 승객과 짐을 싣고 내릴 때마다 기우는 문제를 겪었어요. 1904년 7월 17일에는 승객 약 3,000명을 태우고 사우스헤이븐을 떠난 뒤 거의 뒤집힐 뻔했고, 질서를 잡으려고 소방 호스까지 써야 했어요. 그 뒤 정원은 2,800명으로 줄었고 객실을 뜯어내고 구명보트를 늘렸어요. 1906년 8월 5일에도 기울어지는 사고가 다시 일어났어요.
배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어요. 1909년 시즌이 끝난 뒤에는 남아 있던 객실 39개를 모두 뜯어냈고, 1912년 시즌 전에는 굴뚝 윗부분을 잘라 높이를 줄였어요. 그런데도 1912년 7월 1일 클리블랜드에서 승객을 태우던 중 약 25도나 기울었어요. 1914년 6월 세인트조지프·시카고 증기선 회사가 배를 사들였고, 해리 페더슨 선장이 지휘를 맡았어요.
| 날짜 | 일어난 일 |
|---|---|
| 1903년 7월 27일 | 첫 시즌에 시카고에서 예인선과 충돌, 예인선 침몰 |
| 1903년 9월 | 속도를 높이고 흘수를 줄이는 개조, 복원성 나빠짐 |
| 1904년 7월 17일 | 승객 약 3,000명을 태우고 거의 전복, 정원 2,800명으로 축소 |
| 1906년 8월 5일 | 다시 기울어지는 사고 |
| 1912년 7월 1일 | 클리블랜드에서 승객 탑승 중 약 25도 기울어짐 |
| 1914년 | 식당 바닥에 5cm 두께 콘크리트, 15~20톤 추가 |
| 1915년 7월 24일 | 시카고강 부두에서 전복, 844명 사망 |
타이태닉 이후 늘린 구명보트와 콘크리트 바닥
1915년 3월, 3년 전 타이태닉호 참사를 계기로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이 앞장선 연방 선원법이 통과됐어요. 이 법에 따라 이스트랜드호를 비롯한 많은 여객선이 구명보트를 모두 갖춰야 했어요. 그런데 이 추가 무게가 가뜩이나 위쪽이 무거운 이스트랜드호를 더 위태롭게 만들었을 수 있어요. 다른 오대호 배들도 같은 문제를 겪을 거라는 반론이 있었지만, 법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서명을 받았어요.
선주는 정원을 줄인 채로 운항하거나 구명보트를 더 달아 정원을 늘리는 것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었어요. 선주는 구명보트를 더 달아 정원을 2,570명으로 늘리는 쪽을 택했어요. 게다가 회사는 1914년 객실층 앞쪽 식당의 낡은 원목 바닥을 뜯고 두께 2인치(51mm)의 콘크리트를 깔았고, 뒤쪽 승강구 근처에도 콘크리트를 한 겹 더 발랐어요. 이렇게 늘어난 무게가 15~20톤이었어요.
7시 28분, 부두에서 6m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
그날 이스트랜드호는 다른 오대호 여객선 네 척과 함께 일리노이주 시서로에 있는 웨스턴 일렉트릭사 호손 공장 직원들을 인디애나주 미시간시티의 소풍 장소로 실어 나를 예정이었어요. 승객들은 오전 6시 30분쯤부터 클라크가와 라살가 사이 시카고강 남쪽 둑에서 배에 오르기 시작했고, 7시 10분에는 정원인 2,500명이 다 찼어요.
많은 승객이 위쪽 갑판에 서 있을 때, 배가 부두 반대쪽인 왼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어요. 선원들은 네 개의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넣어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오전 7시 28분, 배는 왼쪽으로 크게 휘청이더니 완전히 옆으로 누워 6.1m 깊이의 강바닥에 닿았어요. 선체는 절반 정도만 물에 잠겼어요.

희생이 컸던 이유는 배 안에 있었어요. 서늘하고 축축한 아침이라 많은 승객이 출발 전 몸을 녹이려고 아래 갑판으로 내려가 있었어요. 배가 갑자기 뒤집히자 수백 명이 안에 갇혔고, 피아노와 책장, 탁자 같은 무거운 가구에 깔린 사람도 있었어요. 승객 841명과 선원 2명이 숨졌어요. 전체 사망자를 844명으로 적는 기록도 있어서 이 글에서는 843~844명으로 봐요.

구조에 뛰어든 사람들과 희생자들
근처에 있던 케노샤호의 존 오미라 선장과 선원들은 재빨리 배를 선체 옆에 붙여 갇힌 승객들이 뛰어내릴 수 있게 했어요. 다른 배 페토스키호의 갑판원 피터 보일은 승객을 구하다 물에 빠져 숨졌고, 웨스턴 일렉트릭의 간호사 헬렌 리파는 구조 작업의 상당 부분을 지휘했어요.
승객 가운데는 이민자가 많았어요. 지금의 체코, 폴란드, 노르웨이, 독일, 아일랜드, 스웨덴, 덴마크, 이탈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출신이 많았어요. 시서로에 자리 잡은 체코 이민자가 특히 많았는데, 배에 탄 체코인 가운데 220명이 숨졌어요. 시신은 신원 확인을 위해 근처 임시 영안실로 옮겨졌고, 그날 오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은 제2연대 무기고로 모였어요. 웨스턴 일렉트릭은 희생자 가족 지원과 복구에 10만 달러를 내놓았어요. 2025년 가치로 약 318만 달러예요.
배에 탈 예정이던 사람 가운데는 스무 살의 미식축구 선수 조지 할라스도 있었어요. 훗날 시카고 베어스의 감독이자 구단주가 되고 NFL 창립 멤버가 되는 사람이에요. 그는 늦게 출발해 배가 뒤집힌 뒤에야 부두에 닿았어요. 신문 사망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실렸지만 나중에 무사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코미디언 잭 베니가 배에 탔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어요. 마지막으로 알려진 생존자 매리언 아이크홀즈는 사고 당시 세 살이었고, 2014년 11월 24일 102세로 세상을 떠났어요.
재판에서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이유
대배심은 증기선 회사 사장과 임원 세 명을 과실치사로, 선장과 기관장을 범죄적 부주의로 기소했어요. 대배심은 승객 과적, 밸러스트 물의 잘못된 처리, 배의 잘못된 구조가 만든 불안정한 상태를 원인으로 봤어요.
피고인들을 일리노이로 넘겨 재판할지를 다투는 심리에서, 배를 지은 조선소 사장 시드니 젠크스는 처음 선주가 과일을 실어 나를 빠른 배를 원해서 시속 20마일(32km)에 승객 500명을 태우는 배로 설계했다고 증언했어요. 변호인 클래런스 대로가 승객 2,500명 이상을 태우는 배로 바뀔 가능성을 생각해 봤느냐고 묻자, 젠크스는 조선소를 떠난 뒤의 일은 알 길이 없었다며 걱정하지 않았다고 답했어요. 그는 이 배의 복원성 시험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인정했고, 진수 때 45도까지 기울었다가 바로 섰으니 안정성은 충분히 증명됐다고 말했어요.
법원은 증거가 너무 약하다며 인도를 거부했어요. 회사 임원 넷은 배에 타고 있지 않았고, 선장과 기관장의 행동은 모두 평소 업무 범위 안에서 한 일이라는 이유였어요. 법원은 이 배가 수년 동안 수천 명을 안전하게 실어 날랐으니 피고인들이 배가 안전하다고 믿은 것도 정당했다고 봤어요. 당시 기자로 더 알려져 있던 시인 칼 샌드버그는 규제 당국이 안전 문제를 외면했다고 비판하는 글을 썼어요.

군함 윌멧호로 30년을 더 산 배
이스트랜드호는 1915년 8월 14일 인양된 뒤 경매에서 일리노이 해군 예비대에 팔렸어요. 포함으로 개조돼 1918년 2월 20일 윌멧호로 이름이 바뀌었고, 같은 해 9월 20일 취역했어요.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라 전투에는 나가지 않았고, 주로 오대호에서 해군 예비군을 훈련하는 배로 쓰였어요.
1921년 6월 7일에는 전쟁 뒤 미국에 넘겨진 독일 잠수함 UC-97을 포격해 가라앉히는 임무를 맡았어요. 1943년 8월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열흘 동안 낚시 휴가를 다녀오기도 했어요. 1945년 11월 28일 퇴역했고, 1946년 10월 31일 고철 업체에 팔려 1947년 해체가 끝났어요.

사고를 기리는 표지판은 1989년 6월 4일 처음 세워졌지만 2000년 4월 26일 도난당했고, 2003년 7월 24일 새 표지판이 다시 세워졌어요. 사고 100년이 되던 2015년 7월 12일에는 시카고 보헤미안 국립묘지에 커다란 배 키 모양의 추모비가 세워졌어요. 같은 해에는 구조 작업을 찍은 것으로 알려진 첫 영상이 발견돼 공개됐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이스트랜드호 참사
승객이 오르기 시작한 오전 6시 30분부터 배가 뒤집힌 7시 28분까지는 58분, 정원 2,500명이 다 찬 7시 10분부터는 겨우 18분이었어요. 강 깊이 20피트는 6.1m, 부두와의 거리 20피트도 6.1m예요. 대략 아파트 2층 높이만큼의 물에서, 부두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800명 넘게 숨진 거예요.
젠크스가 증언한 처음 설계는 승객 500명이었고, 사고 당일에는 2,500명이 탔어요. 설계 때 생각한 인원의 다섯 배예요. 정원 2,570명 기준으로는 약 97%가 찬 상태였어요. 1904년 3,000명을 태우고 거의 뒤집힌 뒤 줄인 정원 2,800명과 비교하면 사고 당일 탑승객은 오히려 적었지만, 그사이 구명보트와 콘크리트 15~20톤이 더해졌어요. 인양까지는 사고 뒤 21일이 걸렸어요.
| 항목 | 기록 | 환산·비교 |
|---|---|---|
| 강 깊이 | 20피트 | 약 6.1m |
| 부두와의 거리 | 20피트 | 약 6.1m |
| 콘크리트 바닥 | 2인치 | 약 51mm, 15~20톤 추가 |
| 처음 설계 | 승객 500명, 시속 20마일 | 시속 약 32km |
| 사고 당일 탑승 | 2,500명 | 설계 인원의 5배 |
| 사망자 | 승객 841명, 선원 2명 | 전체 844명이라는 기록도 있음 |
| 유가족 지원금 | 10만 달러 | 2025년 가치 약 318만 달러 |
유람선이나 여객선을 탈 때는 정원을 넘겨 태우지 않는지 확인하고, 승무원 안내 없이 한쪽 갑판이나 난간으로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게 해 주세요. 배가 기울기 시작하면 안쪽 선실보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 가까이로 이동하고, 구명조끼 위치를 출발 전에 미리 알아 두세요.
참고 자료
- Wikipedia, SS Eastland
- Eastland Disaster Historical Society
- 사진: Eastland Postcard - View of Eastland taken from Fire Tug in river.png
- 사진: S.S. Eastland c.1911.jpg
- 사진: Capsizing of the SS Eastland, as witnessed by Satterfield.jpg
- 사진: EastlandKenosha.jpg
- 사진: Eastland disaster port side.jpg
- 사진: The USS Wilmette.jpg
- 사진: Eastland Disaster Plaque.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