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 7월 말, 그린란드 서쪽 배핀만에서 고래잡이배 두 척이 영국 해군 함선 에러버스호와 테러호를 만났어요. 두 배는 랭커스터 해협으로 건너갈 좋은 날씨를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그것이 유럽인이 이 배들을 본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존 프랭클린 경이 이끈 장교와 수병 129명은 그 뒤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 주는 직접 기록은 사실상 종이 한 장뿐이에요. 1859년 킹윌리엄섬의 돌무더기 안에서 나온 해군성 인쇄 양식지로, 여백에 휘갈겨 쓴 몇 줄이 배를 버린 날짜와 사망자 수를 전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이후 150년 동안 수색대와 과학자들이 유물, 유골, 그리고 이누이트의 증언을 맞춰 가며 복원한 이야기예요. 두 배의 난파선은 2014년과 2016년에야 바닷속에서 발견됐어요.
북서항로의 마지막 빈칸을 메우러 떠난 두 척
유럽에서 바다로 아시아에 가는 서쪽 지름길을 찾는 일은 15세기부터 이어졌어요. 1800년 무렵에는 온대 지역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북서항로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탐험의 무대는 캐나다 북쪽 북극해로 옮겨 갔어요. 1804년부터 1845년까지 해군성 제2차관을 지낸 존 배로는 북극 탐험대를 잇달아 보냈어요. 그 결과 1845년에는 북서항로가 숨어 있을 만한 미지의 영역이 약 18만 1,300㎢(7만 제곱마일)의 사각형 지역으로 좁혀졌어요. 새 탐험대가 항해해야 할 거리는 대략 1,670km였어요.
지휘관을 고르는 일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당시 82세이던 배로가 첫손에 꼽은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는 북극에 지쳤다며 사양했고, 두 번째 후보 제임스 클라크 로스는 아내에게 극지 탐험을 그만두겠다고 약속했다며 거절했어요. 세 번째 후보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너무 젊다는 이유로 해군성이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조지 백은 따지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프랜시스 크로지어는 본인이 겸손하게 사양해 빠졌어요. 결국 배로는 마지못해 59세의 프랭클린을 골랐어요. 프랭클린은 1818년부터 북극을 경험했고, 1819~1822년과 1825~1827년 두 차례 캐나다 북극 해안 육로 탐험을 이끈 사람이었어요.

기관차 엔진과 통조림 8,000개, 당대 최신 장비
에러버스호(378톤)와 테러호(331톤)는 둘 다 1839~1843년 남극 탐험에 쓰였던 튼튼한 배였어요. 이번에는 런던·크로이던 철도의 기관차를 개조한 증기 엔진을 실어 스크루 프로펠러를 돌리게 했고, 증기만으로 시속 7.4km(4노트)를 낼 수 있었어요. 쇠판으로 보강한 뱃머리, 선원용 증기 난방, 얼음에 부서지지 않도록 프로펠러와 방향타를 선체 안으로 끌어올리는 장치도 갖췄어요. 1,000권이 넘는 책을 갖춘 도서관도 실었고, 3년 치 식량에는 통조림 수프와 채소, 소금에 절인 고기, 페미컨, 살아 있는 소까지 포함됐어요.
통조림은 스티븐 골드너라는 납품업자가 맡았는데, 계약은 1845년 4월 1일, 출항 겨우 7주 전에 맺어졌어요. 골드너는 8,000개나 되는 주문을 서둘러 만들었고, 그 탓에 일부 통조림의 품질 관리가 흔들렸어요. 나중에 확인된 납땜은 두껍고 엉성해 안쪽 면으로 녹은 촛농처럼 흘러내린 모양이었다고 기록돼 있어요. 이 납땜은 한 세기 넘게 지나 탐험대의 운명을 둘러싼 가장 유명한 가설의 출발점이 돼요.
1845년 5월 19일 아침, 장교 24명과 수병 110명이 켄트주 그린하이드에서 출항했어요. 그린란드 서해안 디스코만에서 마지막 편지를 썼는데, 편지에는 프랭클린이 욕설과 음주를 금지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어요. 이곳에서 환자 5명이 돌려보내져 최종 인원은 129명이 됐어요.

빅토리 포인트 쪽지가 전하는 마지막 3년
탐험대는 1845~1846년 겨울을 비치섬에서 보냈고, 이때 세 명이 숨져 그곳에 묻혔어요. 1846년 여름 필 해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두 배는 9월 킹윌리엄섬 앞바다에서 얼음에 갇혔고, 그 뒤 다시는 항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요. 이 과정을 알려 주는 유일한 1차 기록이 두 번에 걸쳐 쓰인 빅토리 포인트 쪽지예요.
첫 번째 글은 1847년 5월 28일 날짜로 양식지 본문에 적혀 있어요. 배들이 얼음 속에서 겨울을 났다는 위치와 함께 '모두 무사함'이라는 말이 있고, 장교 2명과 수병 6명이 5월 24일 배를 떠났다고 적었어요. 이 글에는 비치섬에서 겨울을 난 해를 1846~1847년으로 잘못 쓴 오류가 있는데, 같은 오류가 다른 사본에도 그대로 있어서 두 장 모두 배 위에서 미리 작성된 것으로 추정돼요.
두 번째 글은 남은 자리가 없어 양식지 여백을 돌아가며 적혀 있어요. 1848년 4월 25일 날짜로, 두 배가 1846년 9월 12일부터 얼음에 갇혀 있다가 4월 22일 버려졌다는 것, 크로지어 함장이 이끄는 105명이 상륙했다는 것, 프랭클린이 1847년 6월 11일 숨졌고 그때까지 장교 9명과 수병 15명이 죽었다는 것을 알렸어요. 마지막 줄은 내일 26일 백스 피시강으로 출발한다는 말이었어요.

남은 사람들은 썰매로 짐을 끌며 캐나다 본토의 백강을 향해 약 400km를 걷기 시작했어요. 고고학 발견으로 보면 대부분 섬 안에서 숨졌고, 30~40명이 본토 북쪽 해안에 닿았지만 가장 가까운 서구인 거점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생을 마쳤어요. 다만 연구자 데이비드 우드먼은 이누이트 증언을 근거로 생존자 상당수가 1848년 이후에도 살아남아 적어도 한 척의 배를 다시 움직였고, 일부는 1851년까지 버텼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어요.
현상금 2만 파운드, 십수 척이 나선 수색전
2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프랭클린의 아내 제인 프랭클린과 의원들, 신문들이 해군성을 압박했어요. 해군성은 1848년 육로와 해로로 세 갈래 수색대를 보냈고, 탐험대 선원들을 도운 사람에게 2만 파운드를 주겠다고 내걸었어요. 2025년 가치로 약 21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돈이에요. 세 갈래 수색이 실패하자 영국 사회의 관심은 더 커져, 프랭클린 찾기가 하나의 성전처럼 번졌다는 기록이 있어요. 1850년 한 해에만 영국 배 11척과 미국 배 2척이 캐나다 북극해를 누볐어요.

1850년 비치섬에서 처음으로 탐험대의 흔적이 나왔어요. 1845~1846년 겨울 야영지 자리와 존 토링턴, 존 하트넬, 윌리엄 브레인의 무덤이었어요. 하지만 메시지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1852년 에드워드 벨처가 이끈 정부 수색대는 다섯 척 가운데 네 척을 얼음 속에 버리고 돌아왔는데, 그중 레졸루트호는 나중에 미국 포경선이 고스란히 건져 영국에 돌려줬어요. 이 배의 목재로 만든 책상 하나는 빅토리아 여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했고, 여러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이 '레졸루트 책상'을 써 왔어요.

이누이트의 증언과 매클린톡이 찾아낸 쪽지
1854년 4월 21일, 허드슨만 회사 일로 부시아반도를 조사하던 존 레이는 펠리만 근처에서 한 이누크를 만나, 백강 하구 근처에서 백인 35~40명이 굶주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른 이누이트도 같은 이야기를 했고, 그 안에는 죽어 가던 선원들 사이에서 식인이 있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어요. 레이는 프랭클린, 피츠제임스, 크로지어 등의 이름이 확인된 은 포크와 숟가락을 이누이트에게서 사들였어요. 그보다 앞선 1854년 3월 31일, 해군은 이미 탐험대원 전원을 복무 중 사망으로 공식 처리한 상태였어요.
정부가 더 이상 수색에 나서지 않자 제인 프랭클린은 직접 프랜시스 레오폴드 매클린톡에게 탐사를 맡겼어요. 대중 모금으로 산 증기 스쿠너 폭스호가 1857년 7월 2일 애버딘을 떠났고, 1859년 5월 5일 윌리엄 홉슨 대위가 이끈 썰매대가 킹윌리엄섬 북서 해안의 돌무더기에서 빅토리 포인트 쪽지를 찾아냈어요. 섬 서쪽 끝에서는 유골 두 구와 함께 장화, 비단 손수건, 향 비누, 스펀지, 슬리퍼, 머리빗, 책이 가득 실린 구명보트도 나왔어요. 매클린톡은 이런 짐이 썰매를 끄는 사람들의 힘만 빼는 쓸모없는 무게였다고 기록했어요.


이후에도 미국의 찰스 프랜시스 홀이 1860~1869년 이누이트 증언 수백 쪽을 모았고, 미 육군 중위 프레더릭 슈와트카는 1878~1880년 수색에 나섰어요. 그가 밝힌 바로는 11개월 4일 동안 4,360km를 썰매로 움직인 여정이었어요. 슈와트카는 기록 문서를 찾지 못했지만 테러호의 존 어빙 중위의 유해를 찾아 스코틀랜드로 보냈어요. 그의 팀은 백강에서 북쪽으로 약 64km 떨어진, 지금 '굶주림의 만'이라 불리는 곳보다 남쪽에서는 탐험대의 흔적을 찾지 못했어요.
납 중독인가 아연 결핍인가, 사인을 둘러싼 논쟁
1981년 앨버타대 인류학자 오언 비티가 법의인류학 조사를 시작했어요. 수습한 뼈에서는 비타민 C 결핍, 곧 괴혈병에서 흔한 패임과 벗겨짐이 보였고, 성분 분석에서는 납이 226ppm 나왔어요. 같은 지역 이누이트 뼈의 26~36ppm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어요. 1984년과 1986년에는 비치섬의 세 무덤을 열어 조사했어요. 영구동토 덕분에 138년이 지나도 잘 보존된 토링턴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세계가 다시 이 탐험대에 주목했어요. 부검은 토링턴의 직접 사인을 폐렴으로, 납 중독을 악화 요인으로 봤어요.
하지만 납의 출처와 역할은 계속 논쟁거리였어요. K. T. H. 파러는 성인에게 증상이 나타나는 혈중 납 80μg/dL에 이르려면 여덟 달 동안 하루 3.3mg을 통조림에서 먹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해 보인다고 반박했어요. 윌리엄 배터스비는 시간당 민물 약 1톤이 필요한 기관차 엔진을 위해 설치한 독특한 담수화 장치가 납이 많은 물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어요. 2013년 연구는 뼈의 납 농도와 동위원소 구성이 평생 일정했다며 항해 중 급격한 납 중독설에 의문을 던졌고, 2016년 하트넬의 엄지손톱 분석은 마지막 몇 주를 빼면 납이 정상 범위였고 대신 아연이 크게 모자랐다고 밝혔어요. 아연 결핍으로 면역이 무너져 이미 앓던 결핵이 악화됐고, 몸이 무너지며 뼈에 쌓였던 납이 피로 풀려나왔다는 해석이에요.
여기 나온 납·아연 수치는 19세기 탐험대원의 유골과 손톱을 분석한 연구 결과예요. 오늘날 식품이나 용기의 안전 기준으로 쓰는 값이 아니고, 납 노출이 걱정된다면 의료기관에서 혈중 납 검사를 받아 보세요.
환경도 결정적이었어요. 탐험대가 고른 킹윌리엄섬 서쪽 경로는 짧은 여름에도 얼음이 잘 풀리지 않는 곳이었고, 섬 동쪽 경로는 여름마다 얼음이 풀려 훗날 로알 아문센이 북서항로를 처음 통과할 때 쓴 길이었어요. 1846~1847년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두 배는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 약 20km 떨어진 얼음 위에 갇혀 사냥이나 낚시를 하기 어려웠어요. 연구자들은 저장 식량에만 기대며 비타민 C뿐 아니라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던 티아민도 모자랐을 것으로 봐요. 1992~1993년 에러버스만 일대에서 나온 뼈 약 400점에서는 살을 발라낸 것과 일치하는 칼자국이 확인돼, 적어도 일부 대원이 극한 상황에서 식인에 이르렀다는 레이의 보고가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됐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프랭클린 탐험대
쪽지와 기록에 나온 날짜와 인원으로 직접 계산해 보면 아래와 같아요. 납 수치는 위키백과에 '열 배'라고 적혀 있지만, 함께 적힌 숫자로 나눠 보면 약 6.3~8.7배예요.
| 항목 | 기록 | 계산해 보면 |
|---|---|---|
| 출항 인원 | 장교 24명 + 수병 110명 | 134명, 그린란드에서 5명 귀환 후 129명 |
| 1848년 4월까지 사망 | 장교 9명 + 수병 15명(프랭클린 포함) | 24명, 남은 인원 129 - 24 = 105명 |
| 얼음에 갇힌 기간 | 1846년 9월 12일~1848년 4월 22일 | 588일(약 1년 7개월) |
| 출항~배를 버린 날 | 1845년 5월 19일~1848년 4월 22일 | 1,069일 |
| 통조림 계약~출항 | 1845년 4월 1일~5월 19일 | 48일(약 7주) |
| 뼈 속 납 농도 | 226ppm 대 이누이트 26~36ppm | 약 6.3~8.7배 |
| 배를 버린 뒤 행군 | 백강까지 약 400km | 약 250마일 |
| 쪽지 발견 | 1848년 작성, 1859년 5월 발견 | 11년 뒤 |
| 난파선 발견 | 에러버스호 2014년, 테러호 2016년 | 배를 버린 지 166년, 168년 뒤 |
166년 만에 바닷속에서 찾은 에러버스호와 테러호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음파 탐지기와 썰매 자력계를 동원한 수색이 여러 차례 이어졌지만 성과가 없었어요. 2008년 시작된 캐나다 국립공원청 수색은 이누이트 역사가 루이 카무칵과 구술사가 도로시 하리 에버가 모은 증언도 참고했어요. 그리고 2014년 9월 7일, 빅토리아 해협 탐사대가 퀸모드만 동쪽 수심 약 11m 바닥에서 갑판 널빤지까지 보일 만큼 잘 보존된 난파선을 찾아냈어요. 그해 10월 1일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가 이 배가 에러버스호라고 확인했어요.
2016년 9월 12일에는 북극연구재단이 킹윌리엄섬 남쪽 테러만의 수심 24m에서 테러호를 찾았다고 발표했어요. 2018년 원격 무인 잠수정 조사에서는 닻줄이 뱃전에 묶여 있는 것이 확인돼, 테러호가 닻을 내린 채 버려진 배가 아니었다고 결론지었어요. 두 난파선은 지금 하나의 국가 사적지로 보호받고, 첫 유물 65점은 영국이, 난파선과 나머지 유물은 캐나다와 이누이트가 함께 소유하기로 했어요.

신원 확인도 이어지고 있어요. 2021년 5월에는 에러버스호의 기관사 존 그레고리의 유골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5대손의 DNA와 대조돼 확인됐고, 2024년 9월에는 턱뼈 하나가 피츠제임스 함장의 것으로 확인됐어요. 북서항로 자체는 1906년 아문센의 요아호가 처음 배로 통과했어요. 그보다 앞서 프랭클린을 찾으러 나선 로버트 매클루어의 탐험대는 얼음에 막힌 길이나마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항로를 확인하고 돌아왔어요.
프랭클린 탐험대 자주 묻는 질문
- 프랭클린 탐험대는 몇 명이었고 몇 명이 살아남았나요?
- 그린란드에서 환자 5명을 돌려보낸 뒤 129명이 북극으로 향했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 프랭클린 탐험대원들은 왜 죽었나요?
- 추위, 굶주림, 괴혈병·폐렴·결핵 같은 질병이 겹친 것으로 보여요. 납 중독이 악화 요인이었다는 가설이 오래 유력했지만, 2016년 연구는 아연 결핍이 더 중요했을 수 있다고 봤어요.
- 에러버스호와 테러호는 언제 발견됐나요?
- 에러버스호는 2014년 9월 퀸모드만 동쪽 수심 약 11m에서, 테러호는 2016년 킹윌리엄섬 남쪽 테러만 수심 24m에서 발견됐어요.
- 빅토리 포인트 쪽지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요?
- 1847년 5월 '모두 무사함'이라는 첫 글과, 1848년 4월 배를 버렸고 프랭클린이 1847년 6월 11일 숨졌으며 105명이 백강으로 출발한다는 두 번째 글이 적혀 있어요.
참고 자료
- Wikipedia, Franklin's lost expedition
- 사진: Franklin Expedition 1845 - HMS Terror - Erebus
- 사진: John Franklin 1845
- 사진: James Fitzjames
- 사진: Franklinexpeditionnote
- 사진: Reward for finding Franklin Expedition
- 사진: The Arctic Council planning a search for Sir John Franklin by Stephen Pearce
- 사진: Durand-brager-453
- 사진: Franklin exp
- 사진: Manproposesgoddisposes
- 사진: Model of the HMS Erebus (1826) trapped in the ice, Nattilik Heritage Centre, Gjoa Haven, September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