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12월 4일 오후 1시쯤,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본토 사이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캐나다 범선 데이 그라티아호의 조타수가 이상한 배 한 척을 발견했어요. 그 배는 비틀비틀 방향을 바꾸며 다가왔고, 돛은 이상하게 펼쳐져 있었어요. 신호를 보내도 대답이 없었고, 갑판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어요. 가까이 가 보니 뱃고물에 적힌 이름은 메리 셀레스트(Mary Celeste)였어요.
배는 멀쩡히 떠 있었어요. 식량은 넉넉했고, 화물로 실은 알코올도 그대로였고, 선장과 선원의 개인 소지품도 손대지 않은 채 남아 있었어요. 없어진 것은 작은 구명보트 한 척과 선장의 항해 도구, 배 서류 대부분, 그리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 10명이었어요. 이들은 그 뒤로 다시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150년 넘게 '유령선'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 사건을, 지어낸 이야기를 걷어 내고 기록으로만 따라가 볼게요.
아마존호로 태어나 메리 셀레스트호가 된 배
이 배의 용골은 1860년 말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펀디만 기슭의 작은 마을 스펜서스아일랜드에서 조슈아 듀이스의 조선소가 깔았어요. 근처 숲에서 벤 나무로 지은 돛대 두 개짜리 브리건틴(앞 돛대는 가로돛, 뒤 돛대는 세로돛을 단 범선)이었어요. 1861년 5월 18일 진수됐고 이름은 아마존호였어요. 등록 서류에 적힌 크기는 길이 99.3피트(30.3m), 폭 25.5피트(7.8m), 깊이 11.7피트(3.6m), 총톤수 198.42톤이었어요.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어요. 첫 선장 로버트 매클렐런은 첫 항해 화물을 싣던 중 병이 나 1861년 6월 19일 세상을 떠났어요. 뒤를 이은 존 너팅 파커 선장 때는 메인주 이스트포트 앞 좁은 물길에서 어구와 부딪혔고, 런던을 떠난 뒤에는 영국 해협에서 다른 범선과 부딪혀 그 배를 가라앉혔어요. 1867년 10월에는 케이프브레턴섬에서 폭풍에 밀려 해안에 올라앉았고, 선주들은 배를 난파선으로 포기했어요.

난파선은 몇 번 주인이 바뀐 끝에 1868년 11월 뉴욕의 선원 리처드 헤인스에게 넘어갔어요. 헤인스는 1,750달러에 배를 사서 8,825달러를 들여 고쳤고, 1868년 12월 미국 선박으로 등록하면서 이름을 메리 셀레스트로 바꿨어요. 1869년 10월 배는 헤인스의 채권자들에게 압류돼 제임스 윈체스터가 이끄는 뉴욕 투자자 모임에 팔렸어요. 1872년 초에는 1만 달러를 들인 대개조로 길이가 103피트(31m), 깊이가 16.2피트(4.9m)로 늘었고 갑판도 한 층 더 생겼어요.
선장 가족과 선원 일곱 명, 알코올 1,701통
새 선장 벤저민 스푸너 브리그스는 1835년 매사추세츠주 웨어럼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성경을 늘 읽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고, 1872년 10월 29일 기준으로 배 지분 12주 가운데 4주를 가진 공동 선주이기도 했어요. 이번 항해 목적지는 이탈리아 제노바였어요. 브리그스는 아내 세라와 1870년 10월에 태어난 딸 소피아를 데려가고, 학교에 다니던 아들 아서는 할머니에게 맡겼어요.
선원도 신경 써서 골랐어요. 일등항해사 앨버트 리처드슨은 윈체스터의 조카사위로 브리그스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이등항해사 앤드루 길링은 스물다섯 살쯤 된 덴마크계 뉴요커였어요. 갓 결혼한 사무장 에드워드 헤드, 그리고 프리슬란트 제도 출신 독일인 선원 네 명이 함께 탔어요. 나중에 나온 추천서는 이들을 '온순하고 일류인 선원들'이라고 적었어요. 화물은 알코올 1,701통이었어요. 출항 전 브리그스는 어머니에게 '배 상태가 아주 좋아서 순조로운 항해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배는 11월 5일 뉴욕 이스트강 50번 부두를 떠났지만 날씨가 나빠 스태튼아일랜드 앞에 닻을 내리고 기다렸어요. 세라는 이 틈에 시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어요. 이틀 뒤인 11월 7일 날씨가 풀리자 메리 셀레스트호는 대서양으로 나갔어요. 같은 무렵 근처 뉴저지주 호보컨에는 제노바로 갈 석유를 기다리던 데이 그라티아호가 있었고, 이 배는 8일 늦은 11월 15일 비슷한 항로로 출발했어요.
1872년 12월 4일, 아조레스 앞바다의 빈 배
데이 그라티아호가 메리 셀레스트호를 만난 곳은 북위 38도 20분, 서경 17도 15분이었어요. 시각은 육상 시간으로 12월 4일 수요일 오후 1시, 배에서 쓰던 해상 시간으로는 12월 5일 목요일이었어요. 모어하우스 선장은 일등항해사 올리버 드보와 이등항해사 존 라이트를 보트에 태워 보냈어요. 두 사람이 본 배의 모습은 이랬어요.
- 돛은 일부만 펼쳐져 있었고 상태가 나빴으며 아예 없어진 돛도 있었어요. 삭구도 많이 상해 밧줄이 뱃전 밖으로 늘어져 있었어요.
- 가운데 큰 해치는 잘 닫혀 있었지만 앞쪽 해치와 뒤쪽 창고 해치는 열린 채 뚜껑이 갑판 위에 놓여 있었어요.
- 큰 해치 위에 얹어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명보트(욜) 한 척이 없었어요.
- 나침반을 담은 함(비너클)이 제자리에서 밀려나 있었고 유리 덮개가 깨져 있었어요.
- 선창에는 물이 3.5피트(약 1.1m) 차 있었어요. 이 크기 배에서는 적지 않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 물 높이를 재는 임시 측심봉이 갑판에 버려져 있었어요.
항해일지는 일등항해사 선실에 있었어요. 마지막 기록은 11월 25일 오전 8시였고, 그때 위치는 아조레스 산타마리아섬 앞바다인 북위 37도 1분, 서경 25도 1분이었어요. 발견 지점에서 400해리(740km) 가까이 떨어진 곳이에요. 선실 안은 출입구와 채광창으로 들어온 물에 젖어 어수선했지만 나머지는 제법 정돈돼 있었어요. 선장 선실 침대 밑에서는 칼집에 든 칼이 나왔어요. 불이 나거나 싸운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고, 사라진 구명보트로 질서 있게 배를 떠났다는 쪽으로 증거가 모였어요.

모어하우스는 이 배를 600해리(1,100km) 떨어진 지브롤터까지 끌고 가기로 했어요. 해상법상 구조한 사람은 배와 화물 값의 상당 부분을 인양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8명뿐인 선원을 두 배로 나눠 드보와 선원 두 명이 메리 셀레스트호를 몰았어요. 데이 그라티아호는 12월 12일, 안개를 만난 메리 셀레스트호는 다음 날 아침 지브롤터에 들어왔어요. 드보는 아내에게 '내가 뭘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무사히 들어왔으니 상관없다'는 편지를 썼어요.
지브롤터 인양 심리와 '핏자국'의 정체
인양 심리는 12월 17일 지브롤터 수석재판관 제임스 코크런 경 앞에서 열렸어요. 심리를 이끈 사람은 지브롤터 법무장관 프레더릭 솔리플러드였어요. 한 역사가는 그를 한번 마음을 정하면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했어요. 드보와 라이트의 증언을 들은 플러드는 범죄가 있었다고 확신했고, 뉴욕의 한 해운 신문도 12월 21일 '어딘가에 범죄가 있었고 알코올이 그 밑에 있다'고 썼어요.

12월 23일 선박 감독관 존 오스틴은 잠수부와 함께 배를 조사했어요. 그는 뱃머리 양쪽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낸 것 같은 칼자국을 찾았고, 선장의 칼에서 핏자국일 수도 있는 흔적을 봤다고 보고했어요. 재봉틀 기름병이 똑바로 서 있었다는 점을 들어 배가 심한 폭풍을 맞지 않았다고도 했어요. 하지만 그 병을 누군가 나중에 다시 세웠을 가능성은 아무도 따지지 않았어요. 영국 해군 함장들의 추가 조사는 난간의 얼룩과 도끼 자국으로 보이는 흠까지 찾아냈어요.
1873년 1월 22일 플러드는 런던 무역위원회에 결론을 보냈어요. 선원들이 화물 알코올을 마시고 취해 선장 가족과 항해사들을 죽인 뒤, 충돌처럼 보이려고 뱃머리를 베고 구명보트로 달아났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칼과 배의 얼룩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니 피가 아니었어요. 미국 영사 허레이쇼 스프레이그가 부탁한 미 해군 로버트 슈펠트 대령의 보고서도 뱃머리 자국은 사람이 낸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무를 깎아 생긴 자연스러운 흔적이라고 결론 내렸어요.
증거가 없자 플러드는 2월 25일 마지못해 배를 풀어 줬어요. 4월 8일 코크런이 정한 인양 보상금은 1,700파운드로, 배와 화물 전체 가치의 약 5분의 1이었어요. 한 전문가는 위험을 생각하면 그 두세 배는 됐어야 한다고 봤을 만큼 낮은 금액이었어요. 코크런은 모어하우스가 심리 도중 데이 그라티아호를 드보에게 맡겨 석유를 배달하게 한 일을 거세게 꾸짖었고, 작가 브라이언 힉스는 이 말투가 모어하우스 일행을 영원히 여론의 의심 속에 남겼다고 썼어요.

반란·해적·보험 사기설이 무너진 이유
심리가 끝난 뒤에도 범죄 의혹은 남았어요. 그러나 하나씩 따져 보면 근거가 약했어요. 선주 윈체스터가 보험을 과하게 들어 사기를 꾸몄다는 의심은 보험사들이 아무 조사도 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됐어요. 1931년 한 잡지는 모어하우스가 메리 셀레스트호를 기다렸다가 선원들을 죽였다는 설을 내놨지만, 데이 그라티아호는 8일 늦게 출발한 더 느린 배라 지브롤터 전에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연구자 폴 베그는 지적해요.
두 선장이 짜고 인양금을 나누려 했다는 설도 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이 친구였다는 증거는 모어하우스 부인이 50년 뒤에 남긴 회고뿐이에요. 힉스는 그런 사기라면 이렇게 눈길을 끄는 미스터리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브리그스가 아들 아서를 버렸을 리도 없다고 반박해요. 해적설도 맞지 않아요. 해적이었다면 값나가는 개인 물품부터 가져갔을 텐데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1925년 브리그스가 종교적 광기로 모두를 죽였다고 쓴 역사가 존 록하트는 나중에 후손을 만난 뒤 사과하고 그 주장을 거둬들였어요.
용오름, 펌프 고장, 알코올 증기 폭발 가설
연구자들은 멀쩡한 배를 모두가 버리고 떠날 만큼 놀라운 일이 있었을 거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같아요. 드보는 갑판에 버려진 측심봉에 주목했어요. 펌프 같은 장비가 고장 나 배에 물이 빠르게 차는 것처럼 잘못 잰 결과를 보고 브리그스가 배를 버렸을 수 있다는 거예요. 강한 용오름이 배를 덮쳤다면 선창의 물과 찢어진 돛·삭구도 설명되고, 용오름의 낮은 기압이 밑바닥 물을 펌프 쪽으로 밀어 올려 물이 더 많아 보였을 수도 있다는 설명도 있어요.

바람이 멎은 배가 산타마리아섬 앞 돌라바랏 암초 쪽으로 흘러가자 좌초를 걱정한 브리그스가 보트를 내렸다는 설도 있어요. 다만 바람이 멎었다면 돛을 모두 펼쳐 바람을 잡으려 했을 텐데, 발견 당시 돛은 상당수가 접혀 있었어요. 이렇게 먼 남쪽까지 빙산이 떠내려왔다는 설은 수로 자료로 보면 가능성이 낮고, 그랬다면 다른 배들도 봤을 거예요.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은 알코올 증기 가설이에요. 1910년 뉴욕의 보험 감정인 아서 퍼트먼은 선창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작은 폭발음이 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증기에 불이 붙어 해치 뚜껑이 날아갔고 겁먹은 사람들이 보트에 올라 밧줄을 끊었다고 봤어요. 1913년 뉴욕 월드는 구멍 많은 술통 몇 개에서 새어 나온 알코올이 가스를 만들었을 수 있다고 썼어요. 브리그스의 사촌 올리버 콥도 이 설을 강하게 지지했어요. 서둘러 배를 떠나느라 보트를 배에 제대로 묶지 못했고, 갑자기 분 바람에 배만 멀어졌다는 시나리오예요.
이 가설의 약점은 불에 탄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어요. 그런데 2006년 화학자 안드레아 셀라가 영국 채널5 방송을 위해 선창 모형에 종이 상자를 술통 대신 넣고 부탄가스로 폭발을 일으켜 봤더니, 화염은 크게 일었지만 모형 안에 그을음이나 탄 자국이 남지 않았어요. 셀라는 압력파형 폭발이라 불길 뒤로 비교적 차가운 공기가 따라왔다고 설명했어요. 2026년 채널5의 다른 다큐멘터리에서는 맨체스터대 화학자 두 사람이 나무와 에탄올로 실험을 다듬어, 흔적 없이 끝나는 빠른 에탄올 증기 폭발이 선원들을 겁먹게 했을 수 있다고 결론 내렸어요.
알코올·부탄 같은 인화성 증기는 밀폐된 공간에 차면 작은 불씨로도 폭발할 수 있어요. 술이나 연료를 보관한 창고·차량 안에서는 불을 쓰지 말고 환기부터 하세요. 위 실험은 전문가가 통제된 조건에서 한 것이니 따라 하지 마세요.
코난 도일이 만든 '마리 셀레스트'와 가짜 생존자들
사실과 허구는 금세 뒤섞였어요. 1883년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돛이 모두 펼쳐져 있었고 부엌에는 불이 타고 있었으며 저녁상이 식지도 않았다는 장면을 지어냈어요.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에요.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884년 1월 콘힐 매거진에 실린 단편 「J. 하바쿡 젭슨의 진술」이었어요. 당시 스물다섯 살 선의(船醫)였던 아서 코난 도일의 초기작이에요.

도일은 배 이름을 '마리 셀레스트'로, 선장을 J. W. 티브스로 바꾸고, 항해 연도와 항로도 1873년 보스턴발 리스본행으로 바꿨어요. 소설일 뿐이었지만 지브롤터에 여전히 있던 스프레이그 영사가 혹시 사실인 부분이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화제가 됐어요. 이 단편이 인기를 끈 뒤로 원래 이름보다 '마리 셀레스트'라는 철자가 더 흔하게 쓰이게 됐어요.
가짜 '생존자 수기'도 잇따랐어요. 1913년 스트랜드 매거진은 사무장이었다는 에이블 포스딕의 이야기를 실었어요. 선원들이 수영 시합을 구경하던 임시 발판이 무너져 모두 빠지거나 상어에게 먹혔다는 내용인데, 브리그스를 '그리그스'로 적고 두 살 딸을 일곱 살로 쓰는 등 기초적인 실수투성이였어요. 1920년대 아일랜드 작가 로런스 키팅이 꾸민 존 펨버턴의 수기는 그럴듯해서 1926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사실로 믿기도 했어요. 1904년 한 잡지는 거대 오징어가 선원을 하나씩 낚아챘다고 했지만, 베그는 오징어가 구명보트와 항해 도구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다고 꼬집어요. 버뮤다 삼각지대 설도 있지만 배가 버려진 곳은 대서양의 전혀 다른 바다였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메리 셀레스트호
| 항목 | 기록 | 계산·환산 |
|---|---|---|
| 배에 탄 사람 | 선장 가족 3명 + 선원 7명 | 10명 모두 행방불명 |
| 출항 ~ 발견 | 1872년 11월 7일 ~ 12월 4일 | 27일 |
| 마지막 일지 ~ 발견 | 11월 25일 오전 8시 ~ 12월 4일 | 9일(위키백과 도입부는 10일로 적음) |
| 마지막 기록 위치 ~ 발견 위치 | 37°1′N 25°1′W → 38°20′N 17°15′W | 대권거리 약 700km(약 377해리) |
| 발견 위치 ~ 지브롤터 | 600해리 | 약 1,111km |
| 선창의 물 | 3.5피트 | 약 1.07m |
| 1872년 개조 후 길이 | 103피트 | 약 31.4m |
| 인양 보상금 | 1,700파운드 = 전체 가치의 약 5분의 1 | 배·화물 가치 약 8,500파운드 |
표의 계산은 기록 숫자로 직접 했어요. 두 좌표를 지구 반지름 6,371km로 대권거리 공식에 넣으면 약 699km, 1해리 1.852km로 나누면 약 377해리예요. 위키백과의 '400해리(740km) 가까이'와 크게 어긋나지 않아요. 아무도 키를 잡지 않은 배가 9일 동안 이만큼 움직였다는 점이 플러드가 일지 조작을 의심한 이유였어요. 1피트는 0.3048m라 103피트는 31.39m, 3.5피트는 1.07m예요. 보상금 1,700파운드가 전체의 5분의 1이면 배와 화물 가치는 1,700×5=8,500파운드 정도가 돼요.
보험 사기로 끝난 마지막 항해
메리 셀레스트호는 풀려나고 2주 뒤 지브롤터에서 모은 새 선원을 태우고 제노바로 떠났어요. 1873년 6월 26일 제노바를 출발해 9월 19일 뉴욕에 돌아왔어요. 하지만 살인과 피 이야기로 유명해진 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1874년 2월 큰 손해를 보고 팔린 뒤 서인도·인도양 항로를 돌며 계속 적자를 냈고, 1879년에는 선장 에드거 터실이 세인트헬레나섬에서 병으로 숨졌어요. 일찍 세상을 떠난 세 번째 선장이라 배가 저주받았다는 말이 돌았어요.
마지막은 사람이 만든 사건이었어요. 1884년 11월 선장 길먼 파커는 보스턴 화주들과 짜고 거의 쓸모없는 화물을 값비싼 물건으로 적은 뒤 배에 3만 달러짜리 보험을 들었어요. 1885년 1월 3일 파커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길에 고나브섬과 본토 사이의 잘 알려진 산호초 로셸루아 뱅크에 일부러 배를 올렸어요. 배 밑바닥이 뜯겨 나가 고칠 수 없게 됐고, 파커는 건진 화물을 미국 영사에게 500달러에 팔고 보험금을 청구했어요.

영사가 산 화물이 거의 가치 없다고 알리자 보험사가 조사에 나섰고 사기가 드러났어요. 1885년 7월 보스턴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공모 혐의에 합의하지 못했고, 판사는 피고들이 보험 청구를 거둬들이고 받은 돈을 돌려주는 선에서 사건을 정리했어요. 당시 사형까지 가능했던 고의 침몰(바라트리) 혐의는 미뤄졌지만, 파커는 명성을 잃고 석 달 뒤 가난 속에 세상을 떠났어요. 2001년 작가 클라이브 커슬러 탐사대가 이 암초에서 난파선 잔해를 찾았다고 발표했지만, 캐나다 지질조사국의 나이테 분석 결과 그 나무는 1894년에도 살아 있던 나무로 밝혀졌어요. 메리 셀레스트호가 부서지고 10년쯤 뒤까지 자라던 나무라 이 배의 잔해일 수 없었어요.
메리 셀레스트호 자주 묻는 질문
- 메리 셀레스트호 선원들은 어떻게 됐나요?
- 선장 브리그스와 아내, 딸, 선원 7명까지 10명은 사라진 구명보트로 배를 떠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뒤 한 사람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왜 배를 떠났는지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어요.
- 메리 셀레스트와 마리 셀레스트 중 어느 이름이 맞나요?
- 실제 배 이름은 메리 셀레스트(Mary Celeste)예요. 마리 셀레스트는 코난 도일이 1884년 단편에서 바꿔 쓴 이름인데, 이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더 널리 퍼졌어요.
- 메리 셀레스트호 발견 당시 음식이 따뜻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 아니에요. 부엌 불이 타고 저녁상이 식지 않았다는 장면은 1883년 신문 기사가 지어낸 내용이에요. 실제 기록에는 식량이 넉넉했고 선실이 물에 젖어 어수선했다고만 나와요.
- 메리 셀레스트호 실종의 가장 유력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 확정된 답은 없어요. 알코올 화물에서 나온 증기 폭발이나 그에 대한 두려움, 용오름이나 펌프 고장으로 물이 찬다고 착각했다는 설명 등이 거론되고, 반란·해적설은 증거가 없어 힘을 잃었어요.
참고 자료
- Wikipedia, Mary Celeste
- 사진: Mary Celeste as Amazon in 1861 (cropped)
- 사진: Villageview
- 사진: Lap desk of Captain Benjamin Briggs from the Mary Celeste (PEM M6557) 02
- 사진: Sir James Cochrane 1841-1877
- 사진: Mary Celeste NYTimes 1873February26
- 사진: Trombe
- 사진: Arthur Conan Doyle by Herbert Rose Barraud 1893
- 사진: Gona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