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2월 26일, 소련 우랄산맥 북부의 눈 덮인 산비탈에서 수색대가 텐트 하나를 찾아냈어요. 텐트는 반쯤 무너져 눈에 덮여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짐도 신발도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더 이상한 건 텐트 천이 안쪽에서 칼로 찢겨 있었다는 점이에요. 영하 수십 도의 밤에 아홉 명이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텐트를 뚫고 밖으로 나간 거예요. 이 일은 60년 넘게 소련과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미스터리로 남았어요. 등반대장의 이름을 딴 '디아틀로프 고개 사건'이에요.
최고 등급 자격을 따려던 대학생 등반대
등반대를 꾸린 사람은 우랄 공과대학(지금의 우랄 연방대학교) 무선공학과 학생 이고르 디아틀로프였어요. 당시 23살이었어요. 대원은 대부분 같은 대학 학생과 동문이었고, 처음에는 남자 8명과 여자 2명, 모두 10명이었어요. 모두 스키 원정 경험이 있는 2급 등반가였고, 이번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3급 자격을 받을 예정이었어요.
3급은 당시 소련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이었고, 300km를 이동해야 받을 수 있었어요. 목표는 스베르들롭스크주 북쪽 끝에 있는 오토르텐산이었어요. 사고가 난 곳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산이에요. 이 경로는 3등급 난이도로 평가됐는데, 대원들은 가장 지나가기 어려운 2월에 이 길을 택했어요. 스베르들롭스크시 경로위원회는 1959년 1월 8일 10명의 원정을 승인했어요.
1월 23일 등반대는 경로 수첩을 받았고, 같은 날 스베르들롭스크(지금의 예카테린부르크)를 떠났어요. 이때 승인 명단에는 11명이 올라 있었어요. 11번째 이름은 세묜 졸로타료프였는데, 그는 원래 비슷한 난이도의 다른 원정대와 함께 가도록 승인받은 사람이었어요. 탐사가 공산당 제21차 대회를 기념하는 이름을 달았다는 문서도 텐트에서 나왔어요.
한 명이 돌아가고, 아홉 명이 산비탈에 텐트를 쳤다
등반대는 1월 25일 이른 아침 기차로 이브델에 도착했고, 다음 날 트럭을 타고 북쪽의 마지막 마을 비자이로 갔어요. 1월 27일 오토르텐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이튿날인 28일, 대원 유리 유딘이 무릎과 관절 통증 때문에 더 걸을 수 없어 돌아갔어요. 그는 류머티즘과 선천성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어요. 이 결정으로 유딘은 원정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됐어요.
남은 아홉 명의 이동은 나중에 현장에서 나온 일기와 카메라로 하루 전날까지 거의 그대로 되짚을 수 있었어요. 1월 31일 고지대 가장자리에 다다른 대원들은 숲이 있는 골짜기에 돌아올 때 쓸 식량과 장비를 묻어 두었어요. 다음 날인 2월 1일 고개를 넘기 시작했지만 눈보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방향을 잃고 서쪽, 홀라트샤흘산 꼭대기 쪽으로 치우쳤어요.
실수를 알아챈 대원들은 1.5km 아래 숲으로 내려가는 대신 산비탈에 텐트를 치기로 했어요. 숲에 들어가면 바람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는데도요. 유딘은 나중에 "디아틀로프는 아마 애써 올라온 높이를 잃고 싶지 않았거나, 산비탈에서 야영하는 연습을 해 보기로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어요. 이 텐트가 아홉 명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에요.
약속한 전보가 오지 않았다, 수색대가 찾은 빈 텐트
디아틀로프는 비자이로 돌아오는 대로 스포츠 클럽에 전보를 보내기로 했어요. 늦어도 2월 12일까지는 올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는 유딘에게 일정이 더 길어질 수 있다고 말해 둔 상태였어요. 이런 원정에서 며칠 늦는 건 흔한 일이어서 12일이 지나도 바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어요. 2월 20일 가족들이 구조를 요구하자 대학 측이 학생과 교사로 꾸린 첫 수색대를 보냈고, 이어 군과 경찰, 비행기와 헬리콥터까지 투입됐어요.
2월 26일 수색대는 홀라트샤흘산에서 텐트를 찾았어요. 텐트를 처음 발견한 학생 미하일 샤라빈은 "텐트는 반쯤 무너진 채 눈에 덮여 있었고, 비어 있었다. 대원들의 짐과 신발은 모두 남아 있었다"고 말했어요. 수사관들은 텐트가 안에서 찢겼다고 판단했어요. 양말만 신었거나 신발을 한 짝만 신었거나 맨발인 사람 아홉 명의 발자국이 1.5km 떨어진 숲 가장자리 쪽으로 이어졌고, 500m쯤 가서는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어요.
숲 가장자리의 큰 시베리아잣나무 아래에서 작은 모닥불 흔적과 함께 첫 두 사람의 시신이 발견됐어요. 크리보니셴코와 도로셴코였고, 신발 없이 속옷 차림이었어요. 나무의 가지는 5m 높이까지 부러져 있었는데, 누군가 나무에 올라가 텐트 쪽을 살폈던 것으로 보였어요. 나무와 텐트 사이 비탈에서는 디아틀로프, 콜모고로바, 슬로보딘이 각각 나무에서 300m, 480m, 63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어요. 텐트로 돌아가려던 자세였어요.
나머지 네 사람을 찾는 데는 두 달이 넘게 걸렸어요. 5월 4일, 잣나무에서 숲 쪽으로 75m 더 들어간 골짜기의 4m 눈 아래에서 네 명이 발견됐어요. 이 가운데 세 명은 다른 대원들보다 옷을 잘 갖춰 입고 있었고, 먼저 숨진 동료의 옷을 가져다 입은 흔적이 있었어요. 두비니나는 크리보니셴코의 불에 탄 찢어진 바지를 입고 있었고, 왼발과 정강이를 찢어진 재킷으로 감싸고 있었어요.
부검 결과: 6명은 저체온증, 3명은 큰 충격
처음 발견된 다섯 명의 부검에서는 사망으로 이어질 만한 상처가 나오지 않았어요. 모두 저체온증으로 숨진 것으로 결론 났어요. 슬로보딘의 두개골에 작은 금이 있었지만 치명상으로 보지는 않았어요.
5월에 발견된 네 명의 부검이 사건의 성격을 바꿨어요. 티보브리뇰은 두개골이 크게 손상됐고, 두비니나와 졸로타료프는 가슴뼈가 심하게 부러져 있었어요. 법의학자 보리스 보즈로즈데니는 이런 손상을 내려면 자동차 사고에 맞먹는 매우 큰 힘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런데 뼈가 부러진 자리에 바깥 상처가 없었어요. 마치 강한 압력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개울 바닥 흐르는 물속에서 발견된 네 명은 머리와 얼굴의 연조직도 손상돼 있었어요. 이 점이 훗날 온갖 소문의 재료가 됐지만, 부검의는 시신이 물속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숨진 뒤에 생긴 손상이라고 판단했어요. 지역의 순록 유목민인 만시족이 영역을 침범한 대원들을 공격했다는 추측도 처음에 나왔지만, 현장에는 대원들 발자국만 있었고 몸싸움 흔적도 없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부검의는 이 큰 부상이 사람의 힘으로 생길 수 없다고 했어요.

언론이 공개된 수사 기록을 바탕으로 전한 내용은 이래요. 여섯 명은 저체온증, 세 명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숨졌어요. 홀라트샤흘산에는 아홉 명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없었어요. 텐트는 안에서 찢겼고, 대원들은 마지막 식사 후 6~8시간 뒤에 숨졌어요. 모두 제 발로 걸어서 텐트를 떠났어요. 한 대원의 옷에서는 어느 정도의 방사능이 검출됐어요. 수사는 1959년 5월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 죽음의 원인이라는 결론과 함께 책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종결됐고, 기록은 비밀 문서고로 들어갔어요.
주황색 구체와 방사능, 음모론이 자란 이유
공식 결론이 모호했던 만큼 빈자리를 채우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사고 당일 밤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 있던 다른 등반대가 북쪽 하늘에서 이상한 주황색 구체를 봤다고 했고, 2~3월에 이브델 주변에서 기상대와 군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비슷한 것을 봤다고 했어요. 다만 이 목격담은 1959년 수사 기록에는 없고, 증인들이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나섰어요.
당시 12살로 대원 다섯 명의 장례식에 갔던 유리 쿤체비치는 시신의 피부가 '짙은 갈색으로 탄' 것처럼 보였다고 기억했어요. 극심한 추위에서 숨진 사람은 피부가 갈색에서 밝은 주황색까지 변할 수 있어요. 그는 나중에 1999년 예카테린부르크에 세워진 디아틀로프 재단의 대표가 됐어요.
그래서 등장한 가설이 군사 실험이에요. 공중에서 터지는 낙하산 기뢰 시험이 그 무렵 그 지역에서 실제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런 폭발은 바깥 상처는 적고 내부 손상이 큰 부상을 남긴다는 주장이에요. 옷의 방사능을 근거로 방사능 무기 실험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방사성 물질이 퍼졌다면 일부가 아니라 모든 대원과 장비가 영향을 받았어야 해요. 기록을 감춘 것도 국내 사고 정보를 숨기는 것이 소련의 일상적인 절차였기 때문이고, 1980년대 말까지 디아틀로프 관련 기록은 어떤 형태로든 모두 공개됐어요.
이 밖에도 산을 휘도는 바람이 불안을 일으키는 초저주파를 만들었다는 가설, 산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강한 활강풍(카타바틱 바람) 가설, 저체온증에 빠진 사람이 오히려 덥다고 느껴 옷을 벗는 '이상탈의' 가설이 나왔어요. 이상탈의 가설은 일부 대원이 오히려 숨진 동료의 옷을 껴입었다는 점과 맞지 않아요.
61년 만의 재수사 결론은 눈사태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는 유족 요청으로 2015~2019년 1959년 수사 증거를 다시 검토했어요. 이들은 사고 당일 밤 바람이 초속 20~30m에 이르는 허리케인급이었고, 눈보라가 몰아쳤으며,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고 봤어요. 1959년 수사관들은 3주 뒤 날씨가 훨씬 좋아진 뒤 현장에 왔기 때문에 이런 조건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재구성한 경과는 이래요. 대원들이 비탈을 가로지르고 눈을 파서 텐트 자리를 만들면서 눈층이 약해졌어요. 밤사이 새로 쌓인 눈의 무게로 위쪽 눈판이 천천히 미끄러지며 입구 쪽부터 텐트를 눌렀어요. 입구가 막히자 대원들은 텐트를 찢고 나가 숲 쪽으로 약 1,500m를 내려갔어요.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대원들은 흩어졌고, 따뜻하게 입은 네 명은 숲에서 더 나은 자리를 찾다가 개울 위에 생긴 눈구멍으로 떨어진 것으로 봤어요. 수사위원회는 나쁜 날씨, 그런 조건에서 대장의 경험 부족으로 고른 부적절한 야영지, 그리고 숲에서 함께 밤을 버티지 않고 흩어진 결정을 원인으로 꼽았어요.
2019년 2월 러시아 당국은 사건을 공식 재수사했고, 이번에는 눈사태, 판상 눈사태, 허리케인 세 가지만 검토했어요. 살인 가능성은 처음부터 배제했어요. 2020년 7월 11일 러시아 검찰청 우랄 연방관구의 안드레이 쿠랴코프 부국장은 눈사태를 '공식 사인'으로 발표했어요. 그는 "영웅적인 사투였다. 공황은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고 말했어요.
2021년에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ETH)의 알렉산더 푸즈린과 로잔 연방공대(EPFL)의 요한 고메가 이끈 연구진이 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지구와 환경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발표했어요. 텐트 바로 위 28도 비탈에 바람에 실려 온 눈이 쌓이다가 비교적 작은 눈판이 미끄러져도 대원들이 입은 부상과 맞는 손상이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이에요. 이 해석대로라면 대원들의 행동은 비이성적인 공황이 아니라 눈사태를 피하려는 교과서적인 대피였던 셈이에요.
그래도 남는 반론과 지금의 추모비
눈사태 결론에 반대하는 근거도 기록에 남아 있어요. 현장에서 눈사태가 지나간 뚜렷한 흔적이나 잔해가 보이지 않았고, 한 달 안에 발견된 시신 위에는 눈이 얇게 덮여 있었을 뿐이에요. 사고 뒤 이 지역에 100번이 넘는 원정이 다녀갔지만 눈사태가 날 만한 조건을 보고한 곳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어요. 텐트에서 숲으로 이어진 발자국이 공황 상태로 뛴 것이 아니라 평소 걸음과 같은 간격이었다는 점도 반론으로 꼽혀요. 2015년 현장을 다녀온 연구자 키스 매클로스키는 바람이 능선 가장자리의 눈을 날려 보내 텐트 자리에 눈이 많이 쌓이기 어려웠다고 지적했어요.
1997년에는 크리보니셴코 카메라의 필름 원판이 수사관 레프 이바노프의 개인 보관함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의 딸이 디아틀로프 재단에 기증했어요. 1990년 이바노프는 수사팀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하늘을 나는 구체를 봤다고 보고한 뒤 지역 고위 관리들로부터 그 내용을 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글을 냈어요. 유일한 생존자 유리 유딘은 2013년 세상을 떠났고, 2016년 7월 1일 페름 지방의 솔리캄스크에 그를 기리는 명판이 세워졌어요.

지금 '디아틀로프 고개'라 불리는 고개는 대원들을 기리려 나중에 붙인 이름이에요. 실제 사고 현장은 이 고개에서 약 1,700m 떨어진 홀라트샤흘산 동쪽 비탈이에요. 이 지역의 눈에 띄는 바위 노두가 추모비 역할을 하는데, 마지막 야영지에서 동남동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있어요.
숫자로 다시 보는 디아틀로프 고개 사건
| 항목 | 기록 | 환산·계산 |
|---|---|---|
| 출발과 이탈 | 1월 23일 출발, 1월 28일 유딘 귀환 | 10명 → 9명 |
| 사고 시점 | 1959년 2월 1일 밤~2월 2일 | 출발 후 9~10일째 |
| 당시 기온 | 영하 25~30도(1959년 기록), 최저 영하 40도(재검토) | 화씨 영하 13~22도, 영하 40도는 화씨도 영하 40도 |
| 바람 | 초속 20~30m(재검토) | 시속 72~108km |
| 텐트 발견 | 2월 26일 | 2월 1일부터 25일 뒤 |
| 마지막 네 명 발견 | 5월 4일, 눈 4m 아래 | 2월 1일부터 92일 뒤 |
| 텐트~숲 거리 | 약 1.5km | 발자국은 500m 뒤 눈에 덮임 |
| 사인 | 저체온증 6명, 큰 부상 3명 | 9명 중 3분의 1이 외상 |
| 재수사 결론 | 2020년 7월 11일 눈사태 발표 | 사고 후 61년 |
| 고개와 현장 거리 | 약 1,700m | 추모 바위는 야영지에서 약 500m |
온도 환산에서 재미있는 점은 영하 40도가 섭씨와 화씨에서 같은 숫자라는 거예요. 화씨 = 섭씨 × 1.8 + 32에 영하 40을 넣으면 −72 + 32 = −40이 나와요. 바람은 초속에 3.6을 곱하면 시속 km가 되니, 초속 20~30m는 시속 72~108km예요. 날짜 계산으로는 2월 1일 밤부터 텐트가 발견된 2월 26일까지 25일, 마지막 네 명이 발견된 5월 4일까지는 92일이 걸렸어요(1959년은 평년이라 2월이 28일이에요). 기록에 나오는 기온이 영하 25~30도와 영하 40도로 갈리는 건, 1959년 수사 기록과 2015~2019년 재검토가 서로 다른 추정을 내놓았기 때문이에요.
겨울 산에서는 바람을 막는다고 경사진 눈 비탈을 깎아 텐트를 치면 위쪽 눈층이 무너질 수 있어요. 눈사태 위험이 있는 비탈은 피하고, 사고가 나면 흩어지지 말고 한곳에 모여 바람을 피할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 저체온증을 막는 기본이에요. 디아틀로프 등반대처럼 숙련된 사람도 얇은 옷차림으로 영하의 바람 속에 흩어지면 버티기 어려워요.
디아틀로프 고개 사건 자주 묻는 질문
- 디아틀로프 고개 사건의 공식 원인은 무엇인가요?
- 2020년 7월 러시아 검찰청 우랄 연방관구는 눈사태를 공식 사인으로 발표했어요. 눈판이 텐트를 덮치자 대원들이 텐트를 찢고 대피했고, 대부분 저체온증으로 숨졌다는 결론이에요.
- 대원들은 왜 신발도 없이 텐트를 나갔나요?
- 기록상 텐트는 안에서 찢겼고, 짐과 신발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재수사에서는 밤사이 미끄러진 눈판이 입구를 막아 대원들이 급하게 텐트를 찢고 나간 것으로 봤어요.
- 디아틀로프 고개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요?
- 출발 직후 1월 28일 무릎과 관절 통증으로 돌아간 유리 유딘이 유일한 생존자예요. 그는 2013년 세상을 떠났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