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무는 달아서 깍두기로도, 뭇국으로도 최고죠. 그런데 이 달큰한 무를 강판에 갈아 생선구이 옆에 곁들이려고 한 입 먹었더니 코끝이 찡할 만큼 매웠던 경험 있으시죠? 통으로 썰어 먹을 때는 괜찮았는데 갈기만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매워질까요? 마늘을 다질 때 알싸해지고 양파를 썰면 눈물이 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예요. 식물들은 다쳤을 때만 작동하는 비밀 무기를 가지고 있거든요. 오늘은 무의 매운맛이 만들어지는 분자 반응과, 매운 무를 고르고 덜 맵게 먹는 실전 요령까지 알려 드릴게요.
무 속에 숨어 있는 두 개의 부품
무, 배추, 양배추, 겨자, 고추냉이, 브로콜리는 모두 십자화과라는 한 식물 가족이에요. 이 가족은 글루코시놀레이트라는 황을 가진 독특한 물질을 품고 있어요. 글루코시놀레이트는 그 자체로는 맵지도 쓰지도 않은, 말하자면 조립 전의 부품이에요. 여기에 짝을 이루는 게 미로시나아제라는 효소예요. 재미있는 건 이 둘이 식물 세포 안에서 서로 다른 칸에 따로 보관돼 있다는 거예요. 무가 멀쩡한 동안에는 둘이 만날 일이 없으니 매운맛도 생기지 않아요.
그런데 칼로 썰거나 강판에 갈거나 이로 씹어서 세포가 부서지면, 따로 있던 글루코시놀레이트와 미로시나아제가 섞여요. 효소는 곧바로 글루코시놀레이트에서 당 부분을 잘라 내고, 남은 부분이 재배열되면서 이소티오시아네이트라는 물질이 만들어져요. 이게 바로 코를 찌르는 매운맛의 정체예요. 곤충이나 동물이 무를 갉아먹으면 그 순간 매운 물질이 만들어져 쫓아내는, 식물의 똑똑한 방어 시스템이죠. 과학자들은 이를 겨자 폭탄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해요.
무의 매운맛은 시니그린이 아니에요
무의 매운맛을 설명하는 글에서 시니그린이라는 이름을 자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시니그린은 주로 겨자와 고추냉이에 많은 글루코시놀레이트예요. 시니그린이 미로시나아제를 만나면 알릴 이소티오시아네이트가 생기는데, 이게 겨자와 와사비 특유의 코를 찌르는 매운맛이에요. 무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요. 무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글루코시놀레이트는 글루코라파사틴이라는 물질이고, 이것이 분해되면 4-메틸티오-3-부테닐 이소티오시아네이트(MTBITC)라는 조금 긴 이름의 물질이 만들어져요. 무의 매운맛은 주로 이 물질에서 나와요.
이 차이가 무와 와사비의 맛 차이를 만들어요. 와사비의 알릴 이소티오시아네이트는 휘발성이 강해서 코로 확 올라가는 매운맛이 특징이고, 무의 MTBITC는 상대적으로 혀와 목에 알싸하게 남는 매운맛이에요. 또 MTBITC는 매우 불안정해서 금방 다른 물질로 변해요. 단무지나 오래 둔 무말랭이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 그리고 단무지의 노란색 일부도 이 물질이 분해되면서 생긴 황 화합물과 색소와 관련이 있어요. 같은 이소티오시아네이트 가족이라도 식물마다 주인공이 다르다는 게 재미있죠.
곱게 갈수록, 갈고 난 직후에 가장 매워요
매운맛의 양은 세포가 얼마나 많이 부서졌느냐에 달려 있어요. 무를 큼직하게 썰면 칼이 지나간 면의 세포만 부서지니 매운맛이 조금만 생기고, 강판에 곱게 갈면 거의 모든 세포가 부서져 매운 물질이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져요. 깍두기로 먹을 때보다 간 무가 훨씬 매운 이유예요. 같은 강판이라도 촘촘한 강판으로 곱게 갈수록 더 맵고, 거친 강판이나 채칼로 썬 무는 덜 매워요. 원하는 매운 정도에 따라 도구를 골라 보세요.
시간도 중요한 변수예요. 효소 반응은 갈자마자 시작되어 짧은 시간 안에 매운 물질이 최대로 쌓여요.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 무의 MTBITC는 불안정해서 금방 분해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간 무는 갈고 나서 몇 분 안이 가장 맵고, 시간이 지날수록 매운맛이 누그러져요. 대신 오래 두면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생기고 색도 누레질 수 있어요. 매운맛을 즐기고 싶다면 먹기 직전에 갈고, 순하게 먹고 싶다면 갈아서 잠시 두었다가 먹는 식으로 조절할 수 있어요.
같은 무라도 부위마다 매운맛이 달라요
무 한 개도 부위에 따라 맛이 꽤 달라요. 잎과 가까운 윗부분, 햇빛을 받아 연둣빛이 도는 부분은 단맛이 강하고 매운맛이 약해요. 반대로 뿌리 끝으로 갈수록 매운맛이 강해져요. 식물이 땅속에서 벌레의 공격을 받기 쉬운 끝부분에 방어 물질을 더 많이 모아 두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어요. 또 껍질 가까운 바깥층은 가운데보다 글루코시놀레이트가 많아 더 매운 편이에요. 그래서 간 무를 순하게 먹고 싶다면 윗부분을, 알싸한 맛을 원하면 아랫부분을 쓰면 돼요.
| 무 부위 | 맛의 특징 | 어울리는 요리 |
|---|---|---|
| 윗부분(잎 쪽, 연두색) | 단맛이 강하고 매운맛이 약함 | 생채, 샐러드, 간 무를 순하게 먹을 때 |
| 가운데 | 단맛과 매운맛의 균형 | 뭇국, 조림, 깍두기 |
| 아랫부분(뿌리 끝) | 매운맛이 가장 강함 | 알싸한 간 무, 매콤한 무생채, 절임 |
| 껍질 가까운 바깥층 | 향과 매운맛이 진함 | 껍질째 절임, 매운맛을 원할 때 |
계절과 재배 환경도 매운맛을 바꿔요
겨울 무는 달고 여름 무는 맵다는 말, 어른들께 들어 보셨을 거예요. 이 말에도 과학적 근거가 있어요. 무의 매운맛은 글루코시놀레이트의 양과 당 함량의 균형으로 결정되는데, 서늘한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자란 무는 당이 많이 쌓이면서 매운맛이 상대적으로 덜 느껴져요. 반면 기온이 높고 가뭄이 들거나 재배 스트레스가 큰 환경에서 자란 무는 글루코시놀레이트가 많아져 더 매워지는 경향이 있어요. 국내 연구진이 알타리무를 계절별로 분석한 결과에서도 계절에 따라 글루코시놀레이트와 당 함량이 달라지고, 이것이 매운맛을 좌우한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품종 차이도 있어요. 조선무처럼 짧고 굵은 재래종, 일본계 품종이 섞인 길쭉한 무, 알타리무, 열무 등은 각각 매운맛과 단맛의 균형이 달라요. 시장에서 무를 고를 때는 들었을 때 묵직하고 껍질이 매끈하며, 윗부분의 연두색이 선명한 것을 고르면 대체로 달고 수분이 많아요. 바람이 들어 속이 비거나 가벼운 무는 식감이 떨어지니 피하는 게 좋아요.
익힌 무는 왜 달까요?
뭇국이나 조림에 들어간 무는 매운맛이 전혀 없고 달큰하죠. 미로시나아제도 단백질로 된 효소라서 열을 받으면 망가져요. 무를 썰자마자 끓는 국물에 넣으면 효소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멈춰 버려서 매운 물질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아요. 이미 만들어진 이소티오시아네이트도 휘발성이 있고 열에 불안정해서 끓이는 동안 날아가거나 분해돼요. 그러고 나면 무 속의 당이 주는 단맛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무를 오래 끓일수록 국물이 시원하고 달아지는 이유이기도 해요.
간 무 덜 맵게 먹는 요령
- 잎 쪽 윗부분을 골라 갈아요.
- 갈고 나서 5~10분 정도 두었다가 먹으면 매운맛이 누그러져요.
- 간 무를 체에 밭쳐 즙을 살짝 짜내면 매운 성분이 즙과 함께 빠져요.
- 식초나 레몬즙, 간장을 조금 섞으면 매운맛이 부드럽게 느껴져요.
- 생선구이나 튀김처럼 기름진 음식과 함께 먹으면 매운맛이 덜 자극적으로 느껴져요.
반대로 알싸한 매운맛을 살리고 싶다면 뿌리 끝부분을 촘촘한 강판에 먹기 직전에 갈면 돼요. 일식에서 튀김 소스에 간 무를 곁들이는 건, 매운 무가 튀김의 느끼함을 잡아 주고 입안을 개운하게 해 주기 때문이에요. 여기에 무 속의 소화 효소들이 전분과 단백질 소화를 돕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실제로 무에는 아밀라아제 같은 효소가 들어 있어요. 다만 효소도 열에 약하니 이런 효과를 기대한다면 생으로 곁들이는 게 좋아요.
무생채와 깍두기에서도 같은 반응이 일어나요
간 무만 매운 건 아니에요. 무생채를 만들려고 채 썬 무를 소금에 절이면, 칼질로 부서진 세포에서 이미 매운 물질이 만들어진 상태예요. 절이는 동안 소금이 수분을 끌어내면서 매운 성분 일부가 즙과 함께 빠져나가고, 시간이 지나며 불안정한 MTBITC가 분해되면서 매운맛이 누그러져요. 그래서 막 무친 무생채는 알싸하고, 하루 지난 무생채는 한결 순하고 단맛이 도드라져요. 무생채가 너무 맵다면 절인 뒤 나온 물을 살짝 따라 버리는 것도 방법이에요.
깍두기나 동치미처럼 발효시키는 음식에서는 이야기가 한 단계 더 나아가요. 무에서 나온 이소티오시아네이트와 그 분해 산물은 발효 초기 국물의 알싸한 향을 만들고, 일부 잡균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에도 한몫해요. 발효가 진행되면서 이 성분들은 다른 황 화합물로 바뀌고, 유산균이 만든 산과 어우러져 동치미 특유의 시원하고 톡 쏘는 맛이 완성돼요. 동치미 국물에서 나는 약간 꿉꿉한 황 냄새도 무의 매운 성분이 변해서 생긴 흔적이에요. 무 한 가지 재료에 숨은 화학이 이렇게 다양한 맛을 만들어 낸다는 게 참 신기하죠.
무말랭이도 재미있는 예예요. 무를 썰어 햇볕에 말리는 동안 세포가 부서진 절단면에서 매운 물질이 생겼다가 분해되고, 수분이 빠지면서 당이 농축돼요. 그래서 잘 말린 무말랭이는 매운맛은 거의 없고 달큰하면서 쫄깃한 식감이 나요. 대신 특유의 향이 강해지는데, 이 역시 무의 황 화합물이 변한 결과예요. 요리하기 전에 무말랭이를 물에 불리면서 한두 번 헹구면 냄새가 줄고 양념이 더 잘 배어요.
이소티오시아네이트와 건강 이야기
이소티오시아네이트는 매운맛뿐 아니라 건강 연구에서도 관심을 많이 받는 물질이에요. 브로콜리 새싹의 설포라판도 이소티오시아네이트의 한 종류고요. 실험실과 동물 연구에서는 항산화, 해독 효소 유도 같은 흥미로운 결과가 여럿 보고됐어요.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무를 먹으면 특정 질병이 예방된다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요. 무는 칼로리가 낮고 수분과 식이섬유가 풍부한 좋은 채소로 즐기되, 특정 효능을 과하게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아요. 위가 약한 분은 공복에 매운 간 무를 많이 먹으면 속쓰림을 느낄 수 있으니 양을 조절해 주세요.
자주 묻는 질문
Q. 무 매운맛은 고추의 매운맛과 같은가요? A. 달라요. 고추의 캡사이신은 열감 수용체(TRPV1)를, 무·와사비의 이소티오시아네이트는 주로 다른 자극 수용체(TRPA1)를 자극해요. 그래서 무의 매운맛은 금방 사라지고 코로 찡하게 올라오는 느낌이 있어요. Q. 무를 냉장 보관하면 매운맛이 변하나요? A. 통무 상태에서는 큰 변화가 없지만, 썰어 둔 무는 절단면에서 반응과 분해가 진행돼 맛과 냄새가 변해요. Q. 무청도 매운가요? A. 무청에도 글루코시놀레이트가 있어 생으로 먹으면 약간 알싸해요.
정리하면, 무의 매운맛은 세포 속에 따로 보관돼 있던 글루코라파사틴과 미로시나아제 효소가 세포가 부서질 때 만나 이소티오시아네이트(MTBITC)를 만들면서 생겨요. 겨자와 와사비의 시니그린과는 다른 물질이라 맛의 결도 달라요. 곱게 갈수록, 갈고 난 직후일수록, 뿌리 끝과 껍질 쪽일수록, 더운 계절에 자란 무일수록 매워요. 익히면 효소가 멈춰 단맛만 남고요. 이 원리를 알면 오늘 저녁 생선구이에 곁들일 간 무의 매운맛도 내 입맛대로 조절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