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계산기
← 블로그로 돌아가기

생활 속 과학

홍차에 레몬 넣으면 색이 옅어지는 이유, 테아플라빈·테아루비긴 색소와 pH의 관계

진한 홍차에 레몬 한 조각을 띄우면 붉은 갈색이 밝은 황금빛으로 바뀌어요. 흔히 안토시아닌 때문이라고 하지만 홍차 색의 주인공은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이에요. 산성에서 색이 옅어지는 원리, 물의 경도와 우유가 색에 미치는 영향, 아이스티가 뿌옇게 흐려지는 크림다운까지 정리했어요.

사과와 쌀, 달걀이 놓인 주방

따뜻한 홍차 한 잔에 레몬 슬라이스를 띄우는 순간, 진한 적갈색이던 차가 스르르 밝은 호박색으로 변하는 걸 본 적 있으세요? 마치 누가 물을 탄 것처럼 색이 옅어지는데, 맛은 오히려 더 산뜻해지죠. 이 작은 변화는 사실 홍차 속 색소 분자들이 산성 환경에 반응하는 화학 실험이에요. 인터넷에서는 안토시아닌이 산에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홍차의 경우엔 조금 다른 주인공이 있어요. 오늘은 홍차 색의 정체와 레몬이 그 색을 바꾸는 원리, 그리고 차 색을 좌우하는 다른 요인들까지 함께 알아볼게요.

홍차의 붉은색은 어디서 올까요?

녹차와 홍차는 같은 차나무(카멜리아 시넨시스) 잎으로 만들어요. 차이는 가공 방식이에요. 녹차는 잎을 따자마자 덖거나 쪄서 잎 속 효소를 멈추게 하고, 홍차는 잎을 비비고 상처 내서 효소가 충분히 일하게 해요. 차 잎에는 카테킨이라는 폴리페놀이 풍부한데, 잎이 상처를 입으면 폴리페놀 산화효소가 카테킨을 산소와 반응시켜요. 사과를 깎아 두면 갈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효소적 갈변 반응이에요. 흔히 이 과정을 발효라고 부르지만, 미생물이 아니라 잎 자체의 효소가 일으키는 산화 반응이에요.

이 산화 과정에서 카테킨 두 분자가 결합해 테아플라빈이 만들어져요. 테아플라빈은 밝은 주황빛과 황금색을 띠고, 홍차의 밝고 선명한 수색과 상쾌한 떫은맛을 담당해요. 산화가 더 진행되면 테아플라빈과 카테킨들이 더 크고 복잡하게 엮여 테아루비긴이 돼요. 테아루비긴은 적갈색을 띠고 홍차의 진한 색과 묵직한 맛을 만들어요. 홍차 한 잔의 색은 주로 이 두 색소의 비율로 결정돼요. 테아플라빈이 많으면 밝고 붉은 기가 선명하고, 테아루비긴이 많으면 어둡고 갈색빛이 강해요.

안토시아닌이 주인공은 아니에요

레몬을 넣으면 색이 변한다는 이야기에서 안토시아닌이 자주 등장하는 건, 안토시아닌이 산도에 따라 색이 극적으로 바뀌는 대표적인 색소이기 때문이에요. 적양배추 즙에 식초를 넣으면 분홍색, 베이킹소다를 넣으면 초록색으로 변하는 실험, 또 버터플라이피 꽃차에 레몬을 넣으면 파란색이 보라색으로 바뀌는 것도 안토시아닌 덕분이에요. 하지만 일반 홍차에는 안토시아닌이 거의 없어요. 일부 특수한 자색 차 품종에는 안토시아닌이 많지만, 우리가 마시는 보통 홍차 색의 대부분은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이 만들어요.

그렇다고 원리가 완전히 다른 건 아니에요.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도 폴리페놀이라서, 분자 곳곳에 수소 이온을 내놓거나 받을 수 있는 수산기(-OH)를 많이 갖고 있어요. 이런 분자는 주변의 산도에 따라 전하 상태가 바뀌고, 전하 상태가 바뀌면 분자가 흡수하는 빛의 파장이 달라지면서 색이 변해요. 안토시아닌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같은 계열의 현상이 홍차에서도 일어나는 거예요.

레몬즙이 색을 옅게 만드는 원리

홍차를 우린 물은 보통 pH 5 안팎의 약산성이에요. 여기에 레몬즙을 넣으면 구연산과 아스코르브산(비타민 C) 때문에 pH가 3 근처까지 내려가요. pH는 로그 단위라서 2가 내려가면 수소 이온 농도는 약 100배가 늘어난 셈이에요. 이렇게 수소 이온이 많아지면 색소 분자의 수산기들이 수소 이온을 더 많이 붙잡은 상태, 즉 이온화되지 않은 중성 형태로 바뀌어요. 특히 적갈색을 띠는 테아루비긴은 이온화된 상태에서 더 짙은 색을 내는데, 산성에서 이온화가 억제되면 흡수하는 빛이 줄어들고 파장이 짧은 쪽으로 옮겨 가면서 색이 밝은 노란빛으로 옅어져요.

반대로 알칼리성 쪽으로 가면 색이 더 진해져요. 홍차에 베이킹소다를 아주 조금 넣어 보면 색이 확 어두워지는 걸 볼 수 있어요. 수소 이온이 떨어져 나가 이온화된 색소가 늘어나기 때문이에요. 이 반응은 되돌릴 수 있어서, 레몬을 넣어 옅어진 홍차에 소다를 넣으면 다시 짙어지고, 거기에 레몬을 더하면 또 옅어져요. 부엌에서 간단히 해 볼 수 있는 산-염기 지시약 실험인 셈이죠. 물론 베이킹소다를 넣은 차는 맛이 이상해지니 실험용으로만 해 보세요.

넣는 것변하는 pH 방향홍차 색 변화
레몬즙·구연산산성 쪽(pH 낮아짐)밝은 황금빛·호박색으로 옅어짐
베이킹소다(실험용)알칼리성 쪽(pH 높아짐)더 짙은 적갈색·검붉은색
우유pH 변화는 작음단백질이 폴리페놀과 결합해 부드러운 갈색
경도 높은 물(센물)약간 알칼리 쪽색이 탁하고 어두워지기 쉬움

물이 바뀌면 홍차 색도 바뀌어요

여행지에서 같은 홍차를 우렸는데 집에서보다 색이 탁하고 표면에 막이 생긴 경험이 있다면 물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칼슘과 마그네슘이 많은 센물은 약간 알칼리성인 경우가 많아서 홍차 색을 더 어둡게 만들어요. 또 센물 속 탄산칼슘과 차 폴리페놀이 반응해 표면에 얇은 갈색 막, 이른바 티 스컴을 만들기도 해요. 영국처럼 센물 지역에서는 이 막이 흔한데, 레몬을 넣으면 산이 탄산칼슘을 녹이고 pH를 낮춰 막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어요.

물속에 철분이 있으면 폴리페놀과 결합해 검푸른색을 띠는 복합체가 생겨 차가 거무스름해져요. 오래된 철 주전자로 끓인 물이나 철분이 많은 지하수에서 이런 현상이 생길 수 있어요. 우리나라 수돗물은 대부분 연수에 가까워서 홍차를 맑고 선명하게 우리기에 좋은 편이에요. 홍차의 색과 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갓 받은 수돗물이나 경도가 낮은 생수를 팔팔 끓여 쓰는 걸 추천해요.

아이스티가 뿌옇게 흐려지는 크림다운

진하게 우린 홍차를 냉장고에 넣어 식히면 맑던 차가 뿌옇게 흐려지는 경우가 있어요. 이걸 크림다운 또는 티 크림이라고 불러요. 뜨거울 때는 잘 녹아 있던 카페인과 테아플라빈, 테아루비긴이 온도가 내려가면서 서로 결합해 작은 입자를 만들고, 이 입자들이 빛을 산란시켜 뿌옇게 보이는 거예요. 좋은 홍차일수록 테아플라빈이 많아서 오히려 크림다운이 잘 생긴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맛이나 안전에는 문제가 없지만 보기에는 아쉽죠.

크림다운을 줄이려면 몇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뜨거운 차를 얼음 위에 부어 한 번에 빠르게 식히면 입자가 크게 자라기 전에 온도가 내려가서 덜 흐려져요. 둘째, 찬물에 오랜 시간 우리는 콜드브루 방식은 카페인과 폴리페놀이 적게 우러나 처음부터 맑은 차가 돼요. 셋째, 레몬을 넣는 것도 도움이 돼요. 산성에서는 복합체 형성이 줄어들어 흐려진 차가 다시 맑아지기도 해요. 아이스 레몬티가 유난히 맑고 투명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어요.

크림다운은 오히려 좋은 품질의 신호로 여겨지기도 해요. 차 업계에서는 크림다운이 잘 생기는 홍차를 테아플라빈과 카페인이 풍부해 맛이 힘차고 밝은 차로 평가하는 전통이 있거든요. 그러니 집에서 만든 아이스티가 뿌옇게 흐려졌다고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투명한 모습이 중요하다면 앞의 방법들을 쓰고, 맛이 중요하다면 그대로 즐겨도 괜찮아요. 뿌연 차를 다시 따뜻하게 데우면 입자가 녹아 맑아지는 것도 재미있는 관찰 포인트예요.

우유를 넣으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밀크티의 부드러운 갈색은 pH 변화보다는 단백질 때문이에요. 우유 속 카제인 단백질은 차의 폴리페놀과 잘 결합해요. 이 결합 덕분에 떫은맛이 줄고 맛이 부드러워지며, 우유의 흰색이 차의 붉은색과 섞여 따뜻한 갈색이 돼요. 그런데 레몬과 우유를 동시에 넣으면 곤란해요. 레몬의 산이 우유 단백질을 뭉치게 해서 몽글몽글한 덩어리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영국식 차 문화에서도 레몬티와 밀크티는 따로 즐겨요. 한 잔에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하세요.

우리는 시간과 온도도 색을 바꿔요

같은 찻잎이라도 우리는 방법에 따라 색이 달라져요. 끓는 물에 가까운 95~100°C로 우리면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이 빠르게 우러나 진하고 붉은 차가 되고, 80°C 정도로 낮추면 색이 옅고 맛도 부드러워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색은 점점 진해지고 떫은맛을 내는 성분도 더 많이 우러나요. 보통 홍차는 2~3분, 잎이 큰 홍차는 3~5분 정도가 기준인데, 색만 보고 우리다 보면 너무 오래 두어 떫어지기 쉬워요. 타이머를 쓰는 게 가장 확실해요.

잎의 크기도 영향을 줘요. 티백에 든 잘게 부순 찻잎(CTC 방식)은 표면적이 넓어 1~2분 만에 진한 색이 우러나고, 통잎 홍차는 천천히 우러나 색이 맑고 투명한 편이에요. 밀크티용으로 진한 색과 맛이 필요한 아쌈 CTC와, 맑은 수색을 즐기는 다즐링 통잎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확연해요. 이렇게 차의 색은 찻잎의 가공, 물, 온도, 시간, 그리고 넣는 재료가 함께 만드는 결과예요.

홍차 색을 관찰하는 재미를 더하고 싶다면 작은 실험을 해 보세요. 투명한 컵 세 개에 같은 홍차를 나눠 붓고, 하나에는 레몬즙 몇 방울, 하나에는 아무것도, 하나에는 베이킹소다 한 꼬집을 넣어 흰 종이 위에 나란히 놓아 보세요. 같은 차가 세 가지 색으로 나뉘는 모습을 보면 pH가 색을 바꾼다는 게 한눈에 이해돼요. 아이들과 함께하면 훌륭한 과학 시간이 되지만, 소다를 넣은 차는 마시지 말고 버려 주세요.

레몬티를 맛있게 즐기는 팁

  • 레몬은 홍차를 다 우린 뒤 넣으세요. 우리는 도중에 넣으면 산이 추출에 영향을 주고 레몬 껍질의 쓴맛이 우러날 수 있어요.
  • 레몬 슬라이스는 1~2분만 담갔다가 건지면 껍질의 쓴맛 없이 향만 즐길 수 있어요.
  • 무농약 레몬이 아니라면 껍질을 굵은 소금이나 베이킹소다로 문질러 씻은 뒤 쓰세요.
  • 얼그레이처럼 베르가못 향이 있는 홍차는 레몬과 향이 잘 어울려요.
  • 색을 더 선명하게 보고 싶다면 투명한 유리잔을 쓰세요.

레몬을 넣으면 맛도 달라져요. 산이 들어가면 떫은맛이 조금 덜 두드러지고 상큼한 향이 더해져서, 진하게 우린 홍차도 한결 가볍게 느껴져요. 또 레몬 속 비타민 C는 차에 든 비헴철 흡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가 있어요. 차의 폴리페놀은 식사 중 철분 흡수를 방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빈혈이 걱정되는 분이라면 식사 직후보다는 식사 사이에 차를 마시는 게 좋아요.

자주 묻는 질문

Q. 녹차에 레몬을 넣으면 색이 어떻게 되나요? A. 녹차는 산화된 색소가 적어 변화가 크지 않지만, 약간 더 밝고 선명한 연둣빛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반대로 알칼리성에서는 누렇게 변하기 쉬워요. Q. 레몬 대신 식초를 넣어도 색이 옅어지나요? A. 산이라면 같은 원리로 색이 옅어져요. 맛은 권하지 않지만요. Q. 색이 옅어지면 카페인이나 성분도 줄어드나요? A. 색은 색소의 전하 상태가 바뀐 것일 뿐, 카페인 양이 줄어드는 건 아니에요.

정리하면, 홍차의 적갈색은 찻잎 속 카테킨이 산화되어 만들어진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이 내는 색이에요. 레몬즙을 넣으면 pH가 떨어지면서 이 폴리페놀 색소의 이온화가 억제되어 색이 밝은 황금빛으로 옅어지고, 알칼리성이 되면 반대로 짙어져요. 흔히 말하는 안토시아닌은 일반 홍차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물의 경도와 우유, 온도도 색을 바꾼다는 점을 기억해 두세요. 다음번 레몬티를 마실 때, 잔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화학 반응을 한번 감상해 보세요.

참고 자료